삶을 덜어내다
가볍게 먹기 시작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간헐적 단식을 시작하며 하루에 두 끼만 먹는데, 일을 시작하면서 요리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도 확 줄어버렸다. 하지만 가벼운 식단을 유지하게 된 데엔 의도적인 요인이 더 크다.
시발점은 얼마 전 감행한 대청소였다. 이사 온 지 3년 만에 부엌 찬장 속 식재료들을 죄다 꺼내 다시 정리했는데 거기에 걸린 시간만 반나절이었다. 집에 이렇게 먹을 게 많았는데 왜 난 매일 뭐 먹을지 고민하는 거지?
비상용으로 구비해 둔 라면은 이미 유통기한이 몇 달이나 지나 있었고 조금 더 저렴하게 구매한다고 대용량으로 주문한 1kg짜리 카카오 파우더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부피가 똑같다. 말린 호로파잎, 타마린드 페이스트, 런던 버러마켓에 있는 향신료 가게에서 충동적으로 구매한 미얀마 카레가루와 나시고랭 파우더... 이렇게 호기심으로 산 생소한 재료들은 응용이 되지 않아 한두 번 바깥세상에 나왔다가 찬장 속에서 묵혀지고 있었다.
지출도 줄일 겸 부엌 정리도 할 겸, 이미 가지고 있는 재료들 위주로 먹기 시작했다. 마트에 가도 고기나 야채와 같은 신선한 재료가 아니면 사지 않고 요리는 일주일에 한두 번만 하기 시작했다. 만들어 둔 음식이 많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쟁여둔 찬장/냉동고템으로 손을 뻗게 됐다.
네덜란드 출장 갔을 때 선물 받았던 치즈와 냉동해 둔 빵 한 조각, 사과 한 개로 한 끼.
삶은 검정콩과 각종 견과류를 갈아서 한 끼.
미리 만들어 두는 음식도 웬만하면 집에 이미 있는 재료들을 활용한다. 아몬드 가루와 너무 익어버린 바나나, 계란을 넣고 머핀을 만들어 두니 일주일 내내 먹을 수 있는 건강 간식이 탄생했다. 디저트는 그릭요구르트와 바나나, 꿀을 섞어 오븐에 구운 다이어트용 '치즈케이크'이다.
가볍게 먹기 시작하니 식재료에 들어가는 비용은 물론이고 요리하고 치우는데 들어가는 시간 또한 확 줄어들었다. 매일 뭐 먹을까 고민하지 않으니 다른 일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여유가 생길 만큼 난 그만큼 먹는 것에 매일 에너지를 쏟는 사람이었다.
덜어내기 시작하니 보이기 시작한다. 내 삶 속 뒤룩뒤룩 찐 군살들.
#미니멀리스트 #글루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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