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어.
해는 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캄캄한 밤 가로등 빛만이 비춘다. 하얀 냉장고에서 프랑스산 레드 와인을 꺼내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래전 어둠 속에 빛나는 불빛 보며 외로움과 고독에 떨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밤하늘의 별들과 달과 음악과 책과 그림이 나의 친구가 되어 나의 고독을 달래준다.
며칠 연이어 맨해튼에서 공연 보고 밤늦게 돌아와 피로가 겹쳐서 아침 호수에 산책하러 가고, 멀리 장 보러 가고, 세탁하며 조용히 하루를 보낸 월요일. 와인 마시며 창밖 보다 문득 지난 세월이 떠오른다. 유튜브에서는 자클린 뒤프레의 첼로 선율이 흐른다.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 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10년 전 대학원 졸업 후 미국인 회사에 취직해 일했다. 뉴욕에 아는 사람 한 명 없는데 준비도 없이 갑자기 뉴욕에 왔고 원래 나의 계획은 두 자녀 미국에서 중고교 공부할 적 난 석박사 과정 끝내고 한국에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뉴욕에서 석사 과정 공부하며 느낀 것은 박사 과정은 내게 너무 무리란 것. 미국에서 대학 과정 졸업한 것도 아니라서 석사 과정 공부도 너무 힘든데 박사 과정 하기 힘들단 생각에 이르렀고 나의 계획은 변경되었다. 박사 과정은 지원하지 말고 취직해 뉴욕에 살자고. 40대 중반 뉴욕에 유학 온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고 대학원 졸업 후 미국인 회사에 취직한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어.
우리 가족의 첫 정착지 롱아일랜드 딕스 힐에 사니 맨해튼은 너무나 먼 곳이었고 그때 맨해튼 문화생활은 꿈도 꾸지 못했지만 뉴욕에 온 지 몇 개월이 지나자 뉴욕의 아름다움에 서서히 눈뜨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자연이 무척 아름다웠다. 맨해튼의 문화는 세월이 흐른 후 늦게 깨달았다. 대학 시절 꿈꾸던 도시가 뉴욕이란 것을 늦게 늦게 알았어. 뉴욕에 대해 내게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뉴욕에 도착하던 첫날 J.F.K 공항 비행기 안에서 지상을 내려볼 때 나무들이 무척 많아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나무와 숲이 날 사로잡았다. 딸아이 고등학교에 매일 데려다줄 때 노란 숲 속을 지나가게 되면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시도 생각이 났다. 내 삶과도 너무나 인연 깊은 <가지 않은 길> 시. 남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니 훗날 내 삶은 너무나 달라지고 있어.
한국인 학생 1명 없는 대학원에서 눈물 겨운 석사 과정 마치고 기적처럼 미국인 회사에 취직해 일하기 시작하니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버렸어. 맨해튼 회사에서 오리엔테이션 마치고 점심시간 한인 타운에 가서 한식 먹으며 행복했지만 회사 생활은 쉽지 않았다. 롱아일랜드에서 회사에 가기 위해 495 고속도를 달렸지.
미국인 회사에서 일하며 동시 롱아일랜드 양로원에서 봉사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노인 복지에 관심이 많아서 봉사 활동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했다. 그때 기록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만 남는다. 그때는 정신없이 지내니 기록할 여유를 찾지 못했다.
20년 전 그때 난 집에서 두 자녀 교육에 힘썼다. 교직에 종사하던 내가 사직서 제출하고 집에서 지내니 주위 친구들이 함께 쇼핑도 하고 카페에 가서 이야기도 하자고 했지만 난 나대로 계획이 있었고 두 자녀들 바이올린 특별 레슨을 받을 무렵이라 정말 1초도 귀한 시간들이었다. 교육학 전공했지만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한 지 눈치채지 못하다 딸아이 초등학교 입학 후 교육 과정이 과거와 달라졌음을 눈치챘다. 딸이 방과 후 수업으로 바이올린 레슨을 받기 시작했고 특별 레슨을 하려고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두 번 레슨 하신 선생님이 딸이 재능 많아 보인다고 해서 바이올린 개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두 자녀 일과를 엄마가 전부 관리하고 나 역시 어학 수업받고 운동하고 첼로 레슨 받고 살림할 무렵이라 사람들 만날 시간이 없이 바빴다. 너무너무 바삐 지낸 날 보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내 상황이 너무 특별하니 한가로이 카페에 앉아 수다 떨지 않은 것이지 특별한 사람만 선택해서 만난 것은 아니었다. 늘 다양한 사람들 만나 이야기하려고 노력했어. 단 그때는 너무너무 바빠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30년 전 그때 난 교직에 종사했다. 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할 무렵 그 무렵도 무척 바빴다. 학교에서 쉴 시간 없이 수업하고 빈 시간 교재 연구하고 틈틈이 사무적인 일을 처리했다. 또한 보충 수업도 하니 더 바빴다. 같은 교사지만 학과목에 따라 교사들의 여유는 너무나 달랐다. 더 많은 수업을 한다고 더 많은 일을 한다고 급여가 더 많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교사는 1주일에 10시간도 채 안 되는 수업을 하니 늘 여유롭게 보였다. 영수 과목 교사들 정말 바빴어. 30년 전 그해 겨울 남들이 부러워한 결혼식을 했다. 그런 그와 인연이 막을 내리고 뉴욕에 올 거란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내 슬픈 운명을 알 수가 없었다.
생은 알 수 없는 건가.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 나의 과거를 돌아봐도 난 늘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열심히 생활했다. 또 10년 후, 20년 후 나의 모습을 알 수도 없다. 그때까지 살아있을련가도 모르겠다.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미리 안다면 좋으련만 내가 아는 것은 어둠과 안개가 우리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
우리 가족의 미래는 나의 미래는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지난 세월 수많은 위기를 맞았다. 위기를 맞을 때마다 난 탈출구를 찾았다.
세상이 캄캄하고 슬플 때도 언제나 꿈을 꾸고 희망을 갖고 위기를 탈출하고자 무척 애를 쓰고 살았다.
사랑하는 자클린 뒤프레의 슬픈 첼로 선율 들으며 와인 마시며 지난 세월을 돌아봤다.
2. 11 월요일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