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15일 수요일
수요일 오전 뉴욕총영사관에 가서 새로 만든 여권을 찾았다. 내게 4번째 여권이다. 여권마다 사진 이미지가 다르다. 인공 지능이 보면 다른 사람이라 착각할 정도로. 마음은 청춘인데 세월이 흘러가니 얼굴 사진은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을 정도라 참 슬프다. 화장기 없고 사진관 조명 아래 촬영한 것이 아니라 더더욱 형편없다. 한 푼 아끼려고 뉴욕 총영사관에서 무료 사진 촬영하다 보니 슬픈 초상화가 되었다. 10년 동안 간직할 여권인데.
여권을 찾아 집에 돌아와 점심 식사를 하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에 갔다. 컨템퍼러리 아트를 볼 수 있는 첼시 갤러리에 방문해 낯선 작가의 전시회를 관람했다. 상업 갤러리 전시회는 언제나 무료이니 좋고 약 300여 개 이상의 갤러리가 밀집되어 있는 곳이라 한꺼번에 모든 갤러리를 볼 수 없으니까 보고 싶은 갤러리만 본다. 철을 주무르는 재주가 대단해 놀랐는데 알고 보니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작가.
물의 나라 베니스도 한 때 뉴욕처럼 '잠들지 않는 도시'였다고. 그래서 셰익스피어가 베니스 배경 <베니스의 상인>을 썼을까. 다시 베니스에 방문하면 사육제도 구경하고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도 가고 베니스 비엔날레 전도 구경할 텐데 오래전 나의 베니스 여행은 완전 초보를 벗어나지 못했다. 스파게티가 맛이 없다고 철없이 불평하는데 일본 여행객 팀 가운데 여권을 분실해 난리가 났다. 그때 만났던 성악 전공하던 학생은 어디서 무얼 할까. 단발머리 남학생은 이탈리아에서 성악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베니스에 여행 간 게 얼마나 오래된 거야. 세월은 얼마나 빨리 흘러가는지 몰라.
첼시 갤러리를 방문하고 꽃가게를 지나면서 장미꽃과 백합 향기 맡으며 걷다 지하철을 타고 줄리아드 학교에 갔다. 저녁 8시 바로크 바이올린 공연을 감상하기 위해서. 바로크 음악 팬들이 많은 뉴욕이라 줄리아드 학교에 꽤 많은 청중들이 찾아왔다.
Wednesday, Jan 15, 2020, 8:00 PM
JEAN-MARIE LECLAIR Sonata for Two Violins without Bass, Op. 12 No. 5
JOHANN GEORG PISENDEL Sonata in A minor for Violin without Bass
FRANCESCO GEMINIANI Sonata for Violin in A minor, Op. 4 No. 12
MARIN MARAIS Sonate a la Maresienne
JOHANN SEBASTIAN BACH Sonata for Unaccompanied Violin in A minor, BWV 1003
JOHANN HEINRICH SCHMELZER Sonatae Unarum Fidium, No. 2 in F major
JOHANN SEBASTIAN BACH Sonata for Harpsichord and Violin in F minor, BWV 1018
수요일 하루 1만 5 천보를 걸었다. 아무래도 천년 먹은 산삼을 구해 먹어야 할까. 뉴욕은 지하철만 타면 새로운 세상을 안내하니 좋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 마음은 매일 설렌다. 오늘은 무슨 세상을 볼까 하면서. 난 평범한 집안에 태어난 평범한 사람이라 재주가 없는 줄 알았는데 50대 중반이 지나가니 재주가 없는 것도 아니더라. 단 하나 재주가 있는데 그게 뭐냐면 "노는 재주". 이건 천재 인공 지능이 할 수 없는 영역이라 하니 웃는다. 정말이지 가진 거 없는 평범한 나는 매일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니 얼마나 재주가 많은가. 기껏해야 커피 한 잔 마시고 맨해튼에서 놀면서 배우고 있는데. 평생 고통 속을 걷다 보니 저절로 노는 재주가 생겼을까. 젊을 적 고생하지 않았다면 이 힘든 뉴욕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진즉 짐 싸서 떠났을 텐데 아직 버티고 있다. 함께 영어 회화 수업을 받은 지인이 내가 뉴욕에 가서 몇 달 안되어 이민 가방 싸들고 한국에 돌아올 줄 알았다고 해서 웃었다. 강남에 사는 그녀 아파트에 초대받아 그녀 아들이 만든 카푸치노 커피도 마셨는데 세월이 많이도 흘러갔네. 서울대에서 학사 석사 과정을 졸업한 지인 아들이 미국 유학을 오려고 계획했는데 요즘 유학이 경비는 경비대로 들지만 유학 마친 후 불확실한 전망이라고 계획을 바꿨다는 말을 오래전 들었다. 지인 남편은 서울에서 대학 교수로 활동하니 아들도 교수의 길을 걷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 듯 추측했다.
화요일 저녁 링컨 센터 메트에서 오랜만에 <라 트라비아타> 오페라를 감상했다. 그날 정오 무렵 운 좋게 러시 티켓을 구했는데 하필 무대 가까운 좌석이라 많이 불편했다. 더구나 중앙에 자리가 있으면 휴식 시간 화장실 가기도 불편하고. 지난달 카네기 홀에서 자주 공연을 보고 보스턴에 여행 다녀오느라 오페라 보지 못하고 넘어갔는데 오랜만에 메트에 가니 너무 낯설어 느낌이 이상했다.
사실 오페라는 뉴욕에 와서 사랑하게 되었다. 런던, 시드니, 빈에 여행 다닐 때 오페라 보고 싶었는데 패키지여행이라 오페라 볼 기회가 없었다. 메트 갤러리 벽에 약 1천 개 정도의 성악가와 지휘자와 매니저 사진이 붙여 있는데 내가 아는 얼굴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다. 그러니 난 아직 오페라에 입문하는 초보 팬에 속한다.
그날(1월 14일) 베르디 오페라 La traviata (라 트라비아타) 공연은 정말이지 너무너무 좋았다. 곡도 예쁘고, 아리아도 좋고, 오케스트라 연주 역시 좋고, 무대 배경과 조명도 멋지고, 무엇보다 댄스에 놀랐다. 얼마나 댄스가 멋지던지 죽는 줄 알았다. 한동안 형편이 어렵다고 뉴욕 시티 발레와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공연을 보지 않았는데 후회가 밀려온 순간. 오페라 보면서 100번 죽었다. 창녀와 귀족의 사랑을 담은 라 트라비아타 이야기는 중학교 시절 친정아버지가 사 준 세계 문학 전집에서 읽은 책 <춘희>를 바탕으로 쓴 오페라. 그때는 창녀란 직업이 뭔지도 모르고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오페라 아리아는 그날그날 성악가 컨디션에 따라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아주 좋아서 다시 보고 싶을 정도였다. 메트에서 1천 회를 넘게 공연했다고 하니 얼마나 인기 많은 작품인가. 내 형편에 250불 내고 볼 수는 없지만 250불 주고 봐도 괜찮을 정도로 공연이 흡족했다. 메트 오페라 정말 멋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