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일 일요일
말없이 3월이 오고 말았다. 며칠 상당히 추웠는데 땅 위에서 작은 꽃 봉오리들이 열리기 시작하지만 뉴욕은 봄의 제전이 아직 이르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는 벌써 벚꽃이 피고 이탈리아에도 자목련꽃이 피었다는 소식도 들었지만.
고국 떠난 지 28년 만에 대학 출강을 했다는 봄소식.
오랜만에 피렌체의 봄소식을 듣고 기뻤다. 외국 생활한 지 28년이 되었다는 분이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노력에 비해 수입이 적지만 대학에서 강의하는 일에 의미를 두고 출강한다는 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도 많다. 어떤 사람은 돈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를 추구하고 사람마다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
피렌체에서 대학에 출강하는 분은 서울에서 대학 시절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냈다. 그러니까 부모 도움 한 푼도 없이 돈을 벌어서 공부를 하며 힘든 외국 생활을 시작해 지금 이탈리아 피렌체에 살고 있는데 이탈리아 남자 만나 결혼도 하고 아들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다. 고국을 등지고 떠날 때 상처 투성이었는데 이제 안정이 된 거 같다고 말씀하셨다. 외국 생활이 힘드니까 고국의 뉴스에는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고. 타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스탤지어는 치명적인 요소라서 눈을 감고 살았다는 슬픈 이야기. 이탈리아 남자를 만나서 신분 문제를 해결해도 넘고 넘어야 할 숙제가 산더미처럼 많은 우리네 생.
멀리서 보면 외국 생활은 아름답지만 하나하나 넘어야 할 벽이 너무나 많기에 꿈을 찾기 위해서는 절망과 절망 속에서도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삶은 어디든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에게 생존의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아. 더구나 꿈을 이루기는 얼마나 어려워. 외국생활은 무엇보다 언어와 신분 문제 해결이 어렵다. 다른 나라에 오면 새로이 탄생하는 것이니 안정되기 위해서 오랜 세월이 걸린다.
항상 예외도 있다. 돈 많고 재능 많은 사람들. 그들과 보통 사람의 삶은 우주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을까. 자신의 출발선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서서히 꿈을 위해 달려가면 좋다. 남과 비교는 절대 금물. 치명적이다.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고통과 아픔이 크다.
그날 두 자녀와 함께 카네기 홀에서 공연 보고 집에 돌아가는 길 멀리서 온 딸이 피곤할 거 같아 플러싱 지하철역에서 택시를 탔다. 우리가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봤다고 하니까 "뉴욕에서 문화생활도 하시네요."라고 했던 분. 뉴욕은 세계 최고의 문화 예술의 도시이지만 뉴욕의 향기를 모른 분들이 더 많다. 눈만 뜨면 육체적 노동을 하면서 최저 임금 받는 분들도 많은 뉴욕. 반대로 세상의 귀족들이 사는 도시.
주말 맨해튼에 가는 7호선 지하철은 정상 운행을 하지 않아서 플러싱에서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111가에 가서 7호선을 타야 하니 불편함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맨해튼에 갔다. 우연히 오래전 지하철에서 만난 에콰도르 출신 거리 음악가를 만났다. 지하철에는 구슬픈 노랫가락이 흘렀다. 부인과 이혼하고 퀸즈에 살고 오래전 구두 수선공을 했는데 수입이 변변치 않아 지하철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는 그. 하루 종일 지하철에서 노래를 부른 게 결코 쉽지 않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세상에 쉬운 게 어디 있어야지. 단 하나도 없다. 세계 최고가 되는 것도 말할 것도 없이 어렵지만 얼핏 보기에 단순한 일인데도 쉽지 않아. 가만히 앉아 음악을 듣는 것과 노래를 부른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우연인지 맨해튼에서 플러싱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그 거리 음악가를 만났다. 매일 지하철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거리 음악가를 평소 만나지 못했는데 특별한 날이었다. 생수 한 병이 든 빨간색 가방을 멘 에콰도르 출신 거리 음악가가 막내딸이 속을 많이 상하게 한다는 말을 해서 가슴이 아팠다.
뉴욕에 살면서 에콰도르에서 온 사람은 기억에 3명 만났다. 한 번은 카네기 홀 근처에서 커피를 마실 때 우연히 이야기를 했는데 에콰도르에서 온 조각가였다. 내게 바다를 좋아하냐고 물으면서 함께 바다 구경하러 가자고 하니 웃었던 기억도 난다. 화장기 없고 주름살 많은 내게 바다를 가자고 하니 웃지 않을 수 있나. 뉴욕에서 오래된 빌딩 보수 공사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후로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한 분은 아파트 아래층 화장실에 누수가 된다고 하니 우리 집 화장실 공사를 했는데 그날 만난 분이 에콰도르 출신 이민자였다. 퀸즈 자메이카에 살고 있다는 분의 따님이 의사가 되어 뉴욕 삶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뜨거운 여름날 종일 화장실 공사를 하니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어서 몹시 불편했고 냉장고에 든 게 수박밖에 없어서 수박을 드렸는데 아주 좋아하셨다.
주말 7호선은 복잡했고 몇 차례 환승해서 맨해튼 로어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 방문했다. 갤러리에 방문하기 전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맥도널드 숍에 들어가 커피 한 잔 주문했다. 지하철에서 잠이 쏟아져 그림 구경도 제대도 하지 못할 거 같아서 잠을 깨기 위해 커피가 필요했다. 커피 한 잔 값이 1.4불. 전에는 1.09불이었는데 인상되었다. 던킨 도너츠 카푸치노가 오후 2-6시 사이 2불이면 차라리 던킨 도너츠 카푸치노 마실 거 같은데 근처에 안 보였다. 비싼 물가이니 항상 지출에 신경을 써야 한다. 눈뜨면 돈이 줄줄 새어가는 자본주의 세상 서민들의 삶은 팍팍하기만 하지. 돈 많은 귀족들은 취향을 즐기는 세상이지만.
커피 한 잔 마시고 갤러리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이민자들이 많이 살던 동네 로어 이스트 사이드 지리에 아직 익숙하지 않다. 맨해튼은 아주 넓지는 않은데도 늘 다닌 곳 지리에 익숙하다. 첼시 갤러리와 달리 로어 이스트 사이드는 일요일 오픈한 갤러리도 있고 아무도 없는 갤러리에서 구경하는 기쁨을 혼자 맛보았다. 심지어 직원도 없는 갤러리에 들어가 그림 감상을 했지만 작품이 무얼 말하는지 이해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늘 그런 것처럼. 어느 갤러리는 꽤 나이 든 커플이 함께 오셔 조각품을 자세히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몇몇 갤러리 구경하다 지하철을 타고 미드타운으로 돌아왔다. 화장실이 무척 급한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상황. 록펠러 센터 지하철역에 내리니 문득 크리스티 경매장 생각이 났다. 그렇지. 크리스티 경매장 화장실은 깨끗하고 좋은 편이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초콜릿색 가죽 소파에 줄리아드 학교에서 자주 만나는 할아버지가 책을 읽고 계셨다. 그분도 음악과 그림을 사랑하나.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천천히 갤러리를 구경했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앤디 워홀의 '달러 사인'도 보고 웃었다. 돈 벌기 얼마나 어려워. 그런데 작가 명성만 높으면 천문학적인 돈으로 변하는 그림 세상. 앤디 워홀도 무명시절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서 캠벨 수프만 매일 먹고살아서 나중 캠벨 수프 작품을 했다는 이야기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종이에 그려진 달러 사인 한 개 값이 무려 4-6만 불. 그럼 달러 사인 100개 그리면 얼마니.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그림 구경하는 젊은 아빠도 있었다. 아들을 아트 딜러 만들려는 걸까.
록펠러 센터에서 나와 성 패트릭 성당에 가서 촛불 켜고 기도를 하고 플러싱으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하면서 아파트 지하에 가서 빨래도 했다. 밀린 일기는 언제 쓰나. 시간은 저만치 달려가고 난 느리게 느리게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