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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유학 초기 시절 추억: 이사 & IKEA

by 김지수


사진 이케아 제공


코로나 19로 마음이 어지러운 나날들. 뉴욕 정착 시절 롱아일랜드 힉스빌(Hicksville) 이케아(IKEA)에서 구입한 노란 쓰레기통에 담긴 쓰레기를 아파트 지하에 가서 버리고 돌아왔다. 노란색 쓰레기통을 보며 문득 정착 시절 추억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 이민 가방 몇 개 들고 어린 두 자녀랑 대한 항공기를 타고 뉴욕 JFK 공항에 도착했다. 인터넷에서 구한 집주인이 우릴 데리러 공항에 마중 나왔다. 그의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 롱아일랜드 딕스 힐 집에 도착했다. 그 후로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아... 얼마나 많은 시련과 아픔을 겪었는지...


뉴욕 롱아일랜드는 낫소 카운티(Nassau County)와 서퍽 카운티(Suffolk County)로 나뉘고, 딕스 힐(Dix Hills)은 서퍽 카운티에 속하고 맨해튼에서는 상당히 멀지만 학군이 좋고 백인이 많이 사는 곳이라 안전한 동네라 생각해 결정했다.


정착 초기는 말로 할 수 없는 고생 시작이었다. 뉴욕이 한국과 다르니까 초기 적응 기간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맨해튼과 달리 롱아일랜드는 차 없이 생활이 불가능에 가깝다. 집 주위에 주유소 하나 있었다. 장을 보려고 해도 차를 타고 달려야 하고 빨래방을 이용하려 해도 차를 타야 하는데 차가 없으니 차를 구입하기 전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오래오래 걸었다. 맨해튼이야 돈만 있으면 편리하다. 정착 초기 고인돌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이민 가방 몇 개에 담을 짐은 한정이 되어 있으니 당장 덮고 잘 이불도 없으니까 도착한 다음날 주인이 직장에 가는 길 힉스 빌 이케아에 데려다주고 우리 가족은 종일 넓은 매장에서 구입해야 할 가구를 구경했다. 매장 안이 얼마나 춥던지 에어컨이 너무 강하게 켜져 죽는 줄 알았다. 또 하나 놀란 것은 한국에 비해 저렴한 가구값. 서비스 요금이 비싼 나라 미국에서 보통 사람들은 저렴한 가구를 구입해 스스로 조립하는 문화다.


이케아에서 가구를 구입하고 집으로 배달해 달라고 주문했다. 물론 배달료는 추가로 계산했다. 하지만 침대 조립가구는 선반에서 꺼내기도 힘들었다. 작은 가구 하나를 구입하면 재미 삼아 조립할 수도 있겠지만 필요한 가구를 한꺼번에 구입해 조립하니 너무너무 힘들었다.


어린 두 자녀가 한 달 동안 매일 눈만 뜨면 고사리손으로 가구를 조립했다. 아들은 자신이 사용할 침대를 조립하고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 딸이 조립했다. 어릴 적 레고를 갖고 놀던 두 자녀에게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하는데 내게는 어렵기만 하고 손재주가 없으니 옆에서 바라만 봤다. 아주 저렴한 가구를 구입해 조립해 티브이 받침으로 사용하고 책상과 침대와 의자와 서랍장이 살림의 전부였다. 가구값은 그다지 많이 들지는 않았지만 조립하는 것이 힘들었다.


백인 학생들이 많은 서퍽 카운티 학교에서 두 자녀는 공부했다. 뉴욕 부촌 딕스 힐이라서 학군 좋은 공립학교 시설은 영화처럼 화려하고 멋졌지만 공립학교니 사립학교처럼 정식 학비는 없지만 미국 교육비는 엄청 많이 들었고 한국처럼 겉으로 심한 치맛바람은 없지만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았다. 영주권이 없는 경우는 훨씬 더 많은 제약이 따랐고 리서치 대회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는데 참가할 수도 없었다.


또 우리 가족이 정착한 첫해 가을 추운데 난방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 주인과 한바탕 다투고 결국 이사를 하게 되었다. 롱아일랜드 딕스 힐은 부촌이라서 학생들은 벤츠 등 고급 승용차를 몰고 학교에 간다. 롱아일랜드는 이민자 가정과는 상대가 안 되는 부유층 가정이 아주 많고 이민자 가정 자녀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뉴욕 롱아일랜드는 한국과 달리 아파트가 많이 없고 아는 사람도 없으니 물어볼 사람도 없고 스스로 구했다. 집주인에게 이사를 한다고 말했지만 아파트 구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두 자녀와 난 공부를 하던 무렵이니 매일 수업 준비와 시험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어렵게 어렵게 낫소 카운티 제리코 아파트를 구해 이사를 했다. 포장 이사 비용이 비싸니 직접 짐을 쌌다. 학교 공부 따라가기도 무척 어려운데 나 혼자 짐을 쌌다. 눈물겨운 이사를 했다. 뉴욕은 아파트 구하기가 무척 어렵다. 신용 카드 점수가 없으니 아파트를 안 준다고! 할 수 없이 미리 6개월치 선불을 내고 계약을 했다.


두 자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니 롱아일랜드보다는 맨해튼에 가까운 뉴욕시로 이사를 왔다. 당시 연구소에서 일했다. 그 무렵 연구소 일을 마치고 다른 사무실에서 일하고 자정 무렵에 집에 돌아왔다. 뉴욕시에서 아파트 구하기는 롱아일랜드 보다 100배 이상 어렵고 힘들었다. 1년 수입, 세금 보고, 신용 점수, 뉴욕 운전 면허증, 사회보장 번호 등 요구 사항도 많고 아파트 측(갑)에서 서류를 보고 결정하니 난 "을"의 입장이다.


뉴욕시는 일단 마음에 든 집이 드물다. 렌트비가 하늘처럼 비싸니 적당한 가격의 아파트를 구하기가 무척 힘들다는 말이다. 안전하고 편리하고 조용하고 깨끗한 곳을 찾으러 정말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뉴욕 부동산 소개료는 한 달 렌트비이지만 한국과 달리 여러 곳을 동시 보여주지도 않는다. 오랜 시간을 투자해 어렵게 집을 구했다.


뉴욕은 선불로 월세를 지불한다. 월세가 비싸니까 마음에 든 아파트가 있으면 바로 계약을 해야 한다. 결국 난 제리코 아파트 한 달 월세를 미리 줬지만 플러싱 아파트 계약 기간과 맞지 않아서 이사를 올 수밖에 없었다. 제리코 아파트 계약 기간이 보름 정도는 남아 돌려받으면 좋겠지만 플러싱으로 이사 온 몇 달 후 아파트 보증금만 받았다.


눈물겨운 이사! 두 곳의 직장에서 일하는 무렵이라 포장할 시간이 없어서 미처 짐을 다 싸지도 못했다. 이삿짐센터 인부들이 거실과 방에 흩어진 짐을 담고 옮겨주었다. 친절한 인부들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팁도 두둑이 줬다. 플러싱은 1940년대 완공된 아파트 벽이라서 커튼 달기도 어려웠다. 우아하고 근사한 커튼이 아니라 블라인드를 달렸는데 우리 힘으로는 어려워 딸 친구에게 부탁을 했지만 역시 힘들다고 하니 아파트 슈퍼를 불렀다. 물론 수고료를 드렸다. 너무너무 바쁜 무렵이라 슈퍼 스케줄과 맞지 않아서 몇 주 동안 블라인드도 없는 곳에서 지냈다. 말하자면 아파트 내부가 환히 비치는데 커튼도 없이 그냥 살았다.


어느 날 보스턴 캠브리지 연구소에서 일하던 딸이 뉴욕에 와서 정착 초기 구입한 이케아 가구와 헌책들을 버리라고 해서 아들과 함께 집 앞 도로변에 가져다 두었다. 혹시나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사용하라고. 플러싱 주택가에도 헌 가구가 놓여 있으니까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파트 지하에 쓰레기를 버리러 갔는데 슈퍼 부인이 날 보고 인상을 쓰면서 "이 책들 당신 집에서 나온 거죠? 도로변에 버린 가구 때문에 경찰에게 딱지 받았어요."라고 하니 너무 미안했다. 만약 알았다면 벌금 받으니까 결코 버리지 않았을 텐데... 슈퍼는 무슨 죄가 있어. 할 수 없이 내가 벌금을 갖다 드렸다. 그때 버린 이케아 가구값은 20불 정도나 되었을까. 그런데 벌금은 100불이었다. 정착 초기 구입한 이케아 가구 일부를 버리고 침대와 책상과 서랍장은 아직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눈물이 주룩주룩 비 오듯 쏟아졌다.


지인 아들이 아주 오래전 콜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갔다. 뉴욕에서 공부하게 된다고 연락이 오니 물가 비싼 뉴욕이라서 내가 이케아에서 이불을 구입해 기차를 타고 맨해튼에 가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합격 축하한다고 말하며 주었다. 한국에서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함께 영어 회화 수업을 받은 지인의 아들이었다. 지인 남편은 판사로 재직했다. 지인 아들은 가능하면 뉴욕에서 남고 싶었는데 인맥도 없이 뉴욕에서 취직이 무척 어렵다고 서울로 돌아갔다.


이민자 삶은 눈물이었다. 이민 1세와 1.5세 고통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어릴 적 이민을 오면 좀 더 적응이 쉬운 편이나 늦게 이민을 오면 적응이 쉽지는 않다. 끝도 없는 장애물을 넘겨야 한다. 가장 큰 걸림돌은 신분 문제와 언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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