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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수 Jul 03. 2020

서른 즈음에

전방에서 추억 하나 둘 셋...


뭉크 The Scream/ Wiki Art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날 문득 수십 년 전 전방에서 지내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때 그 시절이 까마득히 오래되었다. 전방에서 1년 살았는데 잊지 못할 추억이 참 많다. 


대학 시절 여행도 자주 다니고 취미 생활도 하면서 멋진 삶을 살 거란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서른 즈음이면 낭만 가득한 삶을 살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거꾸로 자꾸만 꿈과 멀어져만 갔다. 


내가 교직에 종사할 때 아이 아빠는 긴 과정을 마치고 군 훈련을 받고 전방에서 1년 동안 근무를 하게 되었다. 겨울에는 영하 20도의 혹한에도 견디고 지내야 했던 곳. 동네 마트도 드물고 탱크 소리만 들려왔다.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매일 군복을 다림질하고 군화를 닦았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도 힘들었다. 새벽 6시경 톨게이트에서 직원에게 전방에 간다고 말하니 웃으며 뭐하러 가냐고 물었다. 젊은 여자가 새벽에 뭐하러 가겠어. 아이 아빠 만나러 간다고 했지. 아이 아빠와 전방 기차역에서 점심시간 무렵 만나기로 약속하고 낯선 길을 찾아갔다. 당시는 차에 GPS 내비게이션도 없던 무렵 낯선 곳을 찾아가는 것도 두려운 일이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낯선 사람에게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물으며 찾아가는데 초행길이라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데 표지판을 보니 직진하면 서울로 진입하게 되니 머릿속이 어지러워 우회전을 하려고 뒤를 돌아보니 대형 버스가 저 뒤에서 달려오니 차선을 변경했는데 그만 충돌 사고가 났다.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내 생에 첫 번째 교통사고였다. 정말 슬쩍 스친 거 같은데 형체도 없이 차가 찌그러졌다. 약속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대형 버스는 그대로 달려가 버리고 내 심장은 터졌다. 대형차에 부딪혔는데 목숨을 건진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시동을 거니 차는 움직였다. 하필 그날이 오월 오일 어린이날이었다. 그때는 자동차 번호판에 서울이 아닌 지방 차라고 적혀 있었다. 얼른 통행량이 적은 곳으로 옮기고 생각했다. 낯선 경기도에서 교통사고가 났지만 당시는 휴대폰도 없을 때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었다.


어린이날이라서 도로는 복잡했고 졸지에 내 차는 동물원 원숭이가 되어버렸다. 범퍼는 덜렁덜렁 차 옆은 찌그러진 채로 달렸으니 그것도 지방 번호판을 단 차를 젊은 여자가 운전하니 그야말로 재밌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떨리는 심장으로 약속 장소를 향해 달려갔다. 가다 멈추면 어떻게 하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스럽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결혼 후 여자니까 운전하면 안 된다고 하던 사람이 낯선 전방에 아내에게 꼭 차를 운전하고 오라고 했다. 결혼 전 연애시절 우린 동등했다. 그런데 결혼 후 우리 관계는 동등하지 않고 수직 관계로 변했다. 아이 아빠는 명령하고 난 순종하는 관계로. 그럴 거라 상상도 못 했다. 


우린 만났다. 그런데 교통사고가 났다고 하니 깜짝 놀랐다. 차 수리 비용은 얼마나 많던지 충격을 받았다. 혼자 엉터리 셈을 했다. 범퍼 한 개 값만 계산했는데 수리 비용이 훨씬 더 비쌌다. 


식사를 하고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우리가 살 집을 구하러 다녔는데 아이 아빠는 너무 피곤하다고 군부대로 들어가 버렸다. 아내 혼자서 구하란 말이었다. 수리된 차를 타고 서울에 있는 형님 아파트로 가서 잠을 자고 다시 전방으로 출근해서 혼자서 빈 집을 구하러 다녔다. 그때 서울 지리도 몰랐다. 서울 형님네 아파트 주소만 알고 찾아갔다. 전방에서 서울까지 길을 안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 서울 길이 얼마나 복잡해. 길을 잃어버려 낯선 사람에게 물어 물어 찾아갔다.


전방에서 집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 박완서 소설에나 등장할 만한 동굴 같은 집들이 많았다. 창문은 없고 문고리 하나 있는 집. 아파트 전세는 너무 비싸고 더러워 눈을 감았다. 조건에 맞는 집을 구하기 어려우니 눈높이는 점점 낮아졌다. 시장과 피아노 학원이 가까운 곳에 겨우 잠을 잘 수 있는 월세방을 정말 어렵게 구했다. 


전방에 우리가 살 공간을 구하고 차를 운전하고 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내려가 짐을 정리했다.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은 시각 집에 돌아와 혼자서 짐을 쌌다. 아파트에 있는 짐을 전부 가져갈 수는 없었다. 꼭 필요한 짐만 가져갔다. 이불과 식기 세트와 커피잔 몇 개와 그리고 친정아버지가 사 준 윌슨 테니스 라켓과 바이올린과 악보 등. 어린 딸아이와 함께 작은 트럭에 짐을 싣고 전방으로 옮겼다. 남은 짐은 그대로 아파트에 두고 친척 동생에게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거주하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군부대 대장 부인과 장교 부인들이 우리 집에 방문한다고 연락이 왔다. 아무것도 없는데 손님 접대할 형편이 아닌데 난리가 났다. 군부대는 상사의 명령을 거역하기 어려웠다. 대장이 별 하나면 대장 부인은 별 두 개. 장교 부인들이 집에 오니 아무것도 없으니 종이컵에 커피믹스를 타서 드렸다. 대장 부인과 장교 부인들이 요즘 세상에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냐고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그때 난 서른 즈음이었다. 전방에 발령이 났을 때 장교가 살 집을 준다고 대학 동창에게 들었는데 우리 가족이 거주할 빈 아파트가 없다고 하니 대소동을 피우며 어렵게 집을 구했는데 대장 부인이 와서 빈 아파트가 있다고 하는 게 아닌가. 


전방에서 근무한 지 2달 정도 지날 무렵 대장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새로운 상사가 왔다. 아내가 교직에 종사하는데 사회생활도 하는 사람인데 아이 아빠가 전방에 발령받았으면 당연 대장에게 찾아가 인사를 가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전 상사는 빈 아파트가 있는데도 주지 않았다. 군부대가 얼마나 특별한 환경인지 처음 깨달았다. 사회생활이 부족한 나를 역력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이사를 했다. 아이 아빠는 귀족 손이라 손하나 끄덕하지 않았다. 아무리 작은 짐이라도 이사는 쉽지 않았다.  결국 아내 혼자의 몫이었다. 부부는 동등하지 않았다. 남편은 명령하고 아내는 순종하는 특별한 관계. 그럴 줄 몰랐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냥 포기하고 적응하고 살았다. 함께 여행도 다니고 낭만 가득한 생활을 꿈꿨는데 현실은 달랐다. 아이 아빠는 퇴근하면 컴퓨터 게임만 했다.  


당시 장교 한 달 급여는 기억에 42만 원 정도. 아이 아빠는 용돈으로 30만 원을 가져가고 남은 돈이 생활비였다. 용돈이 생활비보다 훨씬 더 많았다. 남은 돈으로 아이 우유 구입하기도 어려웠다. 필요한 물품은 PX를 이용하고 5일장을 이용했다. 미역 줄거리와 갈치 등을 구입했다. 학교에는 휴직계를 처리하고 전방에 갔다. 통장에는 비상시에 사용하려고 모아둔 돈이 있었다.  


아이 아빠는 군부대에 출근하고 난 매일 피아노 학원에서 레슨을 받았다. 원래는 바이올린 레슨을 받으려다 레슨비가 너무 비싸 포기했다. 새벽에는 테니스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 군 아파트는 렌트비와 전기세와 관리비 등이 없었다. 그럼에도 한 달 10만 원은 생활비로 턱없이 부족했다. 아끼고 또 아꼈다. 학교에서 재직할 때 모은 비상금으로 피아노를 구입했다. 매일 피아노 연습하니 아파트에 사는 장교 부인이 자녀들 레슨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초등학생들 레슨비 받아서 내 피아노와 테니스 레슨비로 충당하고 가끔 서점에 가서 책을 구입했다. 


어느 날 시부모님이 전방에 오신다고 연락이 왔다. 서울 큰 형님 가족과 함께 오셨다. 한 달 생활비가 10만 원이라서 특별한 요리를 준비하지 못하고 형편에 맞춰 음식상을 준비했다. 큰 형님네가 깜짝 놀랐다. 아니... 하면서. 전방 물가는 비쌌다. 내 형편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어느 날 군복을 다림질하는데 숨이 멎는 고통이 시작되었다. 하혈을 하는 순간에 가까스로 아이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나중 알고 보니 사산이었다. 병원에서 임신 중절 수술을 받아야 했다. 고난은 쉬지 않고 날 찾아와 흔들었다. 하루 왕복 4시간 통근하면서 교직 생활하고, 아이 아빠 군 훈련받을 때 혼자서 몇 시간 고속도로 달려 면회 가고, 그리고 전방에 이사 가고 등 힘든 삶으로 유산을 했나 보다 생각했다. 


유산을 하게 되니 새벽 테니스 레슨을 중지했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임신을 했다. 1년 근무를 마칠 무렵 고향으로 발령이 났고 난 당시 학교에 복직하려고 했는데 아이 아빠는 사표를 쓰라고 강요를 했다. 결혼 후에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가 원하는 삶을 만들어 가고 싶었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녀 키우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란 조건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우리 부부는 겉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부. 안은 겉과 달랐다. 주위 친구들은 우리가 귀족이라 생각했다. 속은 가난에 시달리는 평민이었다. 의무와 책임으로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 교과에서 본 뭉크의 <외침> 그림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 후 자꾸 생각났다. 나의 최선을 다하려고 했지만 삶은 내가 원하는 방향과 자꾸 틀어지고 있었다. 


삶은 고해다. 끝없는 문제들과 투쟁했다. 폭풍은 쉬지도 않고 불었다. 그럼에도 내 향기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고통으로 얼룩진 내 삶이 날 뉴욕에 데리고 왔을까. 폭염에 잠시 수 십 년 전으로 추억 여행을 떠났다. 그때는 먼 훗날 내가 뉴욕에 와서 살게 될 거라고 몰랐다. 누가 생을 알겠는가. 뉴욕에 오려고 준비할 때 김광석의 노래를 자주 들으며 위로를 받았다. 



서른 즈음에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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