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수 Jun 27. 2020

슬픈 내 운명

첫사랑 

"고독은 비와 같다"로 시작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고독'이란 시처럼 내가 평생 고독한 길을 걷게 될 거라고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꿈 많은 대학 시절 한 남자를 만났다. 친구들은 우리 커플을 모두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봤다.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했던 남자와의 만남을 축복이라고 믿었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릴 때 모두 장밋빛 인생을 살 거라고 부러워했다. 슬픈 내 운명을 아무도 몰랐다. 

 

꿈 많은 대학 시절 함께 카페도 가고 생맥주 집에도 가고 극장에도 가고 야구장에도 갔다. 대학 시절 만나서 만 7년 동안 교제하고 약혼하고 결혼을 했지만 연애와 결혼은 너무나 달랐다. 결혼 생활이 무덤이라고 종종 듣기도 했지만 내가 주인공이 될 줄 몰랐다. 결혼 후 의무로 풀려나기 어려운 두터운 밧줄에 꽁꽁 묶여 숨도 쉬기 힘들었다.

 

남편 뒷바라지와 자녀 양육은 끝없는 헌신과 사랑이었다. 집도, 차도, 사업 자금도 모두 아내의 몫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특별한 길을 걸었다. 늘 바쁘단 핑계로 집에 없었다. 그가 모든 과정을 마치고 군 복무까지 마치고 사업체를 시작한 것은 30대 중반이 지나서였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는가. 가난과 몸부림치던 시절이 막이 내리고 결혼 후 수십 번 이사를 하다 60평대 아파트로 옮겼다. 오랫동안 내 몸을 칭칭 감던 가난의 허물을 벗었다. 비로소 그의 사회적 위치의 겉과 안이 같았다. 

 

어느 날부터 난 은빛 날개를 날고 대학 시절 꿈꾸던 세계 여행을 떠났다. 런던, 파리, 베를린, 하이델베르크, 드레스덴, 프라하, 베니스, 동경... 장미꽃잎이 조금씩 열리듯 아름다운 꿈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거센 운명의 회오리바람이 불어왔다. 무더운 여름날 그는 나의 첼로를 거실 바닥에 던졌다.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당시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 레슨을 받았다. 딸아이 이태리제 바이올린도 진즉 부서 버렸다. 어느 날 그의 은밀한 비밀을 알았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랬구나. 그가 집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난 바보 멍청이처럼 그의 말만 하늘처럼 믿고 살았다. 눈물이 빗물처럼 주룩주룩 내려 앞을 가렸다.

 

그날 혼자 대학 도서관 앞 잔디밭에 찾아가 펑펑 울며 지난날을 돌아봤다. 무에서 시작해서 세상이 부러워한 위치에 도착했다. 아내의 내조 없이 불가능했다. 그를 위해 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대학 시절 교재 복사비가 필요하다고 하면 달려가 갖다 주고, 밤늦은 시각 버스비가 없다고 전화하면 달려가 주고, 그가 특별한 과정을 밟는 동안 모든 뒷바라지를 했다. 거액의 사업 자금을 준비하기 위해 매일 눈만 뜨면 은행장을 만나러 다녔다. 남편과 시댁과 두 자녀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결혼 후 매주 토요일 오후 시댁에 찾아가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넓은 평수 아파트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부모를 위해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 내에 중형 아파트를 사 드렸다. 사랑받는 막내며느리였다. 두 자녀 교육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다. 특별 레슨을 받게 되니 엄마의 역할이 힘들었다. 쏟아지던 눈물이 그쳤다. 그를 떠나 뉴욕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살자고 결정하니 웃을 수 있었다. 고난과 역경과 고독이 날 키웠다. 집에 돌아가 어린 두 자녀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여름 방학이 시작하자 거실 탁자 위에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로 시작하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 시와 함께 우리는 뉴욕에 갈 거라고 적은 메모를 남겨 두고 두 자녀와 함께 가출을 하고 변호사를 만나 이혼 소송을 청구했다. 


나의 첫사랑은 실패하고 말았다. 내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하얀 병동에 날 강제적으로 가두려고 했지만 극적으로 탈출을 해서 뉴욕에 왔다. 40대 중반 어린 두 자녀 데리고 뉴욕에 간다고 하니 모두가 불가능한 꿈이라고 했다. 사십 대 중반 부와 명예와 사회적 위치를 다 벗어 버리고 멀리 떠나왔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뉴욕은 우리 가족에게 사하라 사막이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은 눈물과 고통이었다. 친정 엄마는 나 때문에 매일 한숨짓는다. 생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삶은 끝없는 도전과 실패였다.




우리의 작별은 숙명이었을까. 무에서 시작한 파란만장한 삶이 아니었다면 결코 뉴욕에 올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비극으로 막이 내렸지만 그를 만나 사랑했고 최선을 다해서 미련도 후회도 없다. 이제 남은 시간은 날 위해 살고 싶다. 부러진 은빛 날개 하나로 수 천 마일을 날아와 낡고 오래된 작은 오두막에서 천천히 내 길을 가고 있다. 눈물과 열정과 고통으로 서서히 새로운 인생이 열리고 있다. 슬픈 내 운명은 날 어디로 데리고 갈까. 




영화처럼 아름다운 뉴욕 맨해튼 센트럴파크


이전 07화 고독한 뉴요커의 인생 2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