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하얀 눈 오는 날
2021. 1. 26 화요일
영수증은 차곡차곡 쌓여가고 신용 카드 빚을 갚을 시기가 다가오고 다음날 렌트비를 낼 시기가 올 때 비로소 한 달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아챈다. 새해 첫 달 무얼 하며 보냈을까. 맨해튼 나들이도 자주 하지 않은 채 동네 공원에 가서 세월을 낚고 있다.
시간은 늘 빨리 달려간다. 내가 붙잡지 않으면 사라져 버린다. 읽으려고 구입한 책은 날 기다리는데 매일 공원에 가서 노느라 책 읽기는 뒷전, 딸이 스마트 TV를 구입한 게 새로운 장막을 열었다. 사운드와 영상이 좋아 무척 마음에 든다. 딸 아님 영영 모를 뻔했다. 삶이 삶이 아니라서 눈을 감고 산다. 세상모른 엄마와 함께 사는 두 자녀는 얼마나 답답할까.
평생 고독한 길을 걷다 보니 혼자 노는 방법을 터득해 잘 논다. 휴대폰 하나면 천국을 만드는 내 재주. 예쁜 호수 풍경 보고 혼자 좋아서 신난다. 만날 친구도 없고 늘 혼자서 재밌게 논다. 뉴욕에서도 만나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내 형편이 복잡하니 혼자 지낸 게 마음 편하다. 사람 만나면 다 돈이니까. 커피 한 잔도 돈이 들잖아. 설혹 상대방이 사도 마음의 빚이 남는다.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안 좋아한다. 그러니까 일부러 연락해서 만난 경우는 드물다. 어쩌다 우연히 만난 경우도 있지만.
텅텅 비어 가는 하얀 냉장고. 달걀도 없으니 마음도 텅텅 빈 듯 느껴졌다. 딸은 동네 마트에 가서 과일을 사 왔다. 한인 마트 과일 가격이 저렴하지 않아서 다른 마켓을 이용한다. 브런치를 먹고 설거지를 할 때 딸이 한인 마트에 장 보러 갈 거냐고 물었다. 한인 마트가 가까이 있으니 좋다. 하얀 눈이 온다는 일기 예보를 보고 눈을 기다리고 있는데 설거지를 할 무렵 눈이 내려 당장 공원에 갈까 아님 장 보러 갈까 하다 한인 마트에 먼저 가기로 결정했다. 장바구니 들고 터벅터벅 걷는데 파랑새 한 마리가 축복의 노래를 불러 기분이 좋았는데 잠시 후 우리를 보고 '바보 멍청이'라고 외쳤다.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붉은색 신호등이 하얀색으로 변하길 기다리는 즈음 들렸다. 우리 말고 사람은 없고 차들만 쌩쌩 달렸다. 그러니까 낯선 사람이 차 안에서 우릴 보고 소리를 질렀다. 아시아인 혐오증인가. 코로나 때문일까...
구수한 빵 냄새나는 파리바케트를 지나 한인 마트에 도착해 파, 두부, 고등어 두 마리, 연어, 달걀, 찜용 갈비 등 필요한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아 계산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추운 날 갈비찜이 맛있다. 감자와 무와 양파와 파와 마늘을 넣어서 끓인 요리를 두 자녀가 무척 좋아한다. 찜용 갈비는 항상 있지는 않은데 구입하니 기분이 좋았지만 물가가 많이 인상되어 돈이 돈이 아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에 식품을 넣어두고 공원에 달려갔다. 하얀 눈이 내리지만 추워서 공원에 갈매기와 기러기가 없을 줄 알았는데 날 기다리고 있어서 반가웠다. 코로나 전에는 매일 가지 않다 늦게 공원 풍경이 매일매일 새롭다는 것을 알았다. 새해 날 찾아온 선물이다. 매일 호수에 가니까 선물을 받았다.
하얀 눈이 내렸지만 몹시 추워 평소와 달리 소수 사람들만 있었다. 어린 아들에게 호수를 가리키면 말하는 엄마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어서 물으니 그리스 사람이라고. 공원에서 그리스 언어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 예쁜 호수 풍경. 마치 구겐하임 박물관 같았어. 춥다고 가지 않았으면 보지 못할 그림 같은 공원. 갑자기 하늘을 날 듯 행복했다. 흰 기러기가 산책하는 것을 가까이서 보니 목에 주름이 많아서 나처럼 늙었구나 짐작했다.
호수 위 기러기들 발자국 보면서 내 인생을 뒤돌아봤다. 쉽지 않은 인생. 20대도 30대도 40대도 50대도 힘들기만 하더라. 한마디로 한 치 앞을 모른 게 인생. 뉴욕에 와서 살 게 될 거라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고 평생 고독하게 살 거라 미처 몰랐다. 삶은 풍비박산. 쉬지도 않고 온갖 역경과 시련이 찾아와 날 흔들었다. 그럼에도 혼자서 잘 논다. 내가 가진 재주일까. 예쁜 풍경 담으며 행복했지만 정말 손이 꽁꽁 얼어버려 휴대폰 열고 닫는 것도 어려워 집에 돌아와 오후 사진 작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천국을 발견하니 기쁨이 넘치는데 혼자서 신선이 된 거 같다고 하니 옆에 있던 딸이 한량과 신선의 차이점이 뭔가 알아보라고 하니 웃었다. 신선인 줄 알았는데 한량이었나. 딸에게 모든 걸 신세 지고 사니 지하 인간이다. 삶이 풀려야 하는데 아직도 꽁꽁 얼어 있다.
어렵고 힘들 때 가끔씩 생각나는 김승희 시인의 시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세상에는 가난하고 쓸쓸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향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들도 있다. 희망으로 태양 같은 정열로 노력하면 언젠가 새로운 인생의 문이 열리지 않을까. 마음속에 희망과 사랑의 등불을 켜고 산다.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김승희(1952∼)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 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밋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에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사진 작업
2021. 1. 26 화요일
하얀 눈은 오래 내리지 않았다.
사진은 오후 1시-2시 반 사이
한 시간 반 동안
몸이 꽁꽁 얼어가는데
천국의 풍경을 보며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