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1 금요일
젊어지는 샘물을 마셨나. 갑자기 20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마법 같은 순간이 아닐지. 꿈도 아니고 영화도 아닌 현실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정말 일어났어. 믿어봐. 어디서. 맨해튼 부촌 어퍼 이스트 사이드 메디슨 애비뉴에서.
세계적인 명품 숍이 즐비한 메디슨 애비뉴에서 시내버스에 탑승하면 승객들 대부분이 노인층이다. 그러니까 난 아주 젊게 느껴진다. 반대로 퀸즈 아스토리아에서 맨해튼을 운행하는 지하철에 탑승하면 주로 젊은 층이라 난 노인이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상대적인 젊음과 늙음.
새벽에 일어나 산책하고 집안일하고 맨해튼에 가니 좀 편히 쉬고 싶으니까 시내버스에 탑승해도 자리에 앉고 싶은데 백발노인이 들어오면 웃으며 자리를 양보한다. 나도 금방 백발노인이 될 텐데 자리에서 일어나 양보해야지. 노인이 되면 다리에 힘도 없어서 불편할 것이니까.
맨해튼은 노인들이 생활하기 편리한 곳이다. 특히 뉴욕 노인들은 예술에 관심이 많고 사랑하니 자주 갤러리와 미술관에 방문하고 음악 공연도 즐겨 보는 게 생활화되었다. 코로나로 한동안 뉴욕이 잠들어 뉴욕 시민들이 고통을 받았을 테지.
부촌 어퍼 이스트 사이드 메디슨 애비뉴는 명품숍이 즐비하니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시골쥐 내 눈도 부촌에 가면 어두운 밤을 비추는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많이 봐야지. 보지 않으면 시력이 나빠진다. 혹시 알아. 언제 로또가 당첨되어 부자로 변신할지. 생이 언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내가 뉴욕에 살 거라 한 번도 상상도 하지 않았지. 그런데 뉴욕에 와서 숨 쉬고 살고 있다. 비록 삶이 고통이지만.
어제 본 메트 특별전을 다시 보러 가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갤러리에 방문하는 게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원래는 집에서 일찍 나왔지만 애석하게 지하철이 자주자주 멈춰 내 스케줄이 변했다. 내 몸에 황금 날개를 달고 자유롭게 날아야 하는데 언제 날개가 돋아날까.
오랜만에 방문한 어퍼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서 혼자 좋은 시간을 보냈다. 첼시와 달리 너무 조용한 갤러리. 어퍼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는 정말 조용하고 좋다. 직원이 내 연락처를 물으면 알려주고 혼자 조용히 감상하면 된다. 봐도 봐도 이해가 어려운 작품들도 무진장 많지만.
아침에 한인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설거지할 때 사용하는 세제를 진즉 구입해야 하는데 잊어버려 마음이 급했다. 간 김에 수박도 샀다. 수박 한 통을 담을 수 있는 노끈을 주냐고 물으니 안 준단다. 그런데 직원이 내 쇼핑 가방이 튼튼하니 괜찮을 거라 말해서 그냥 샀다.
무더위에 수박처럼 좋은 간식이 어디에 있을까. 딸이 사 온 아이스 팥빙수는 맛이 좋았지만 가격이 꽤 비쌌다. 달걀과 세제와 두부와 수박 한 통을 사고 마트를 나와 시내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수박은 맛은 좋은데 왜 그리 무거울까. 도저히 걸어서 집까지 갈 에너지는 없어서 시내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다고 수박 한 통 사고 택시를 부를 수는 없지. 배보다 배꼽이 큰 경우가 되니. 뉴욕 택시값은 얼마나 비싸. 택시비가 저렴하면 자주자주 이용할 수도 있을 텐데. 가난이 설움이다. 참고 견뎌야 해. 날개 하나 부서져 뉴욕에 오니 완전 소설 속 주인공으로 변했어.
각자 취향이 다르다. 서로 다른 취향을 존중하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남에게 피해를 준다면 생각이 달라진다. 시내버스를 기다리는데 내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 난 담배 냄새를 무척 싫어한다. 그런데 앞에서 담배를 피우니까 기분이 안 좋았다. 한 개비 담배를 피우고 나서 내가 앉아 있는 벤치로 다가와 자리를 비켜 달란다. 아... 피곤하니 잠시 앉아 있는데. 자리를 양보했다. 담배 피우는 남자는 내 마음을 전혀 모른 듯. 자리를 양보하니 감사하단다. 담배 피운 것도 부족해 내 자리를 비켜 달라고. 20분 정도 기다린 후 시내버스에 탑승하고 집 근처에 내렸다.
수박을 샀으니 룰루랄라 기분이 좋았다. 냉장고에 수박을 넣고 아들과 함께 운동을 하러 다녀오고 식사 준비를 하고 식사하고 맨해튼에 가려고 밖으로 나오니 시내버스가 사라지고 없다. 할 수 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그런데 내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가 나타났다. 휠체어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남자. 경기가 안 좋아서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럴까. 요즘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더 늘어난 듯 느껴진다.
플러싱 지하철역에 도착해서 맨해튼에 가는 7호선에 환승. 로컬은 달팽이처럼 느리게 느리게 운행하더니 그것도 부족해 가다 멈추고 멈추고... 나 어떡해. 맨해튼에서 하고 싶은 게 많은데 멈추면 어떡하냐고 말해도 지하철이 내 말을 알아들을 리 없고.
퀸즈보로 플라자 역에서 환승하면 난 늙은이가 된다. 아스토리아에서는 오는 지하철은 승객들이 대체로 젊다. 카네기 홀 역에 도착하니 홈리스가 의자에 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다.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될 텐데.. 의식이 없는 듯 보였다. 뉴욕에 불쌍한 사람들이 참 많다.
아지트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잠시 책을 읽다 어퍼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 갔다.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아침 일찍 산책하고, 장 보고, 운동하고 집안일하고 맨해튼에서 몇몇 갤러리에 방문해 전시회를 보고 마지막 힘을 내어 기록을 하고 있다.
코로나로 잠든 뉴욕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여기저기서 수많은 이벤트와 축제가 열린다고 연락이 오는데 내 에너지가 부족하다.
지금 뉴욕에서 트라이베카 영화제도 열리고 뉴욕 필하모닉 무료 공연도 열리고 맨해튼 음대에서도 공연 보라고 연락이 왔는데 에너지가 부족해 책과 산책과 전시회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매일매일 즐거움을 찾는다. 내가 찾지 않으면 즐거운 일이 저절로 찾아오지 않더라. 매일 날 행복하게 해 줄 스케줄을 만든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지만 소소한 행복은 도처에 널려있다. 이른 아침 산책할 때는 장미꽃, 수국 꽃, 백합꽃 등을 보고 새들의 합창을 들었다.
오랜만에 선선한 날씨라서 좋았다.
에어컨 없이 지내도 좋은 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