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빙자한 국토대장정 ?!
2022. 11. 19
Day 4. 숙소 - 써밋전망대 - 스타벅스 - 배터리파크 - 시청 - pier 17 - 돌진하는 황소 - 트리니치교회 - 조스피자 - pier 66 - 슬립노모어 - 베슬 - 허드슨백화점 - 하이라인 - 숙소
오늘은 한국에서 사전에 예약해뒀던 곳들을 가는 날이다. 써밋전망대를 갔다가 연극 슬립노모어를 관람하는 코스였다. 써밋전망대는 새로 생긴 전망대이다. 하지만 난 휴대폰이 고장났기 때문에 위치를 몰랐다. 워낙 정신없는 여행을 한 탓에 위치를 모른다는 사실도 전날 밤에서야 깨달았다. 갖고 있는 지도를 죄다 펼쳐 찾아봤지만 새로 생긴 전망대라 지도에 없었다. 한국에서 찾아봤던 기억을 되살리다가 엣지에 써밋전망대가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예약시간도 아침 9시였다. 폰이 고장났기에 알람도 없어서 긴장한 채로 잠들었더니 6시쯤 눈이 떠졌다. 전 날 사 온 파이브가이즈 햄버거를 먹었다. 바로 먹은 게 아닌데도 꾸덕꾸덕하고 맛있었다. 고칼로리의 맛. 패티는 부산 버거샵에서 먹은 패티 맛이 났다. 길을 잘 모르니 8시에 나서자는 생각이었지만 아침시간은 왜 그렇게 빨리 흐르는지 계획보다 늦게 출발했다.
지하철역을 착각해 잘못 내렸다. 다음 열차 시간도 안 떠서 택시라도 탈 심정으로 무작정 개찰구 밖으로 뛰쳐나갔다. 택시가 아예 없었다. 방도가 없어 다시 지하철역으로 들어오니 지하철이 3분 남아서 다시 탔다. 이 때가 8시 45분이었다. 몇 정거장 가다가 도저히 9시 안에 도착 못할 것 같아서 환승 정거장인 유니온 스퀘어에 내렸다. 택시도 몇 없고 보이는 택시라곤 사람이 다 타고 있어서 멀찍이 주차된 택시를 향해 달렸다. 웬걸 기사님이 안 계셨다. 또 달려가다보니 주차된 택시가 있어 올라탔다. 뉴욕 노란 택시 타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렇게 뜬금없이 이루게 되었다. 어쩌면 뉴욕 노란 택시를 타려던 내 큰 그림 아니였을까? 목적지를 묻길래 써밋 전망대라고 말씀드렸다. 더불어 아마 엣지에 있을거라고 말씀드리니 구글에 다른 곳을 검색해서 보여주셨다. 알고 보니 써밋전망대는 엣지에 있는 게 아니였다. 택시를 안 탔으면 혼자 애먼 곳에서 길 헤맬 뻔했다. 기사님이 내려주신 곳은 내가 전 날에 길 헤매다 우연찮게 갔던 그랑드센트럴터미널이었다. 난 기사님이 잘못 내려주신 줄 알고 속으로 기사님을 원망했다. 써밋 가지말라는 신의 계시인가 생각하고서 포기하려고 하던 순간 터미널 왼쪽 건물에 써밋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가보니 써밋이었다. 어제 바로 옆까지 가놓고도 써밋이 있는 걸 몰랐다니.
나는 워낙 인기많은 전망대라 제 시간에 입장 안 하면 칼같이 입장 컷할 줄 알고서 티켓 보여줄 때 한껏 쫄아있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줄도 길었고 내 뒤로도 줄이 금방 생겼다. 오전 첫 타임이라 사람이 적을 줄 알았던 내 예상과는 달리 주말이라 그런가 사람이 진짜 많았다. 나는 티켓을 프린트한 건 무효일까봐 걱정했지만 지금까지 갔던 전망대 모두 프린트한 티켓도 입장시켜주셨다. 보안검사도 했다. 드디어 한번에 통과했다. 종이 팔찌에 그려진 QR코드를 인식시켜서 사진을 전망대 여기저기서 찍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냥 내 얼굴과 내 모습을 뉴욕 유명 관광지에 합성시켜놓은 사진을 $45 주고 구매해야 되는 거였다. 근데 결과물 진짜 구리다. $5정도여도 살까말까 고민할 수준.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에 도착했다. 어제 갔던 탑오브더락이랑 이 전망대랑 위치가 가까워서 보이는 풍경도 비슷했다. 탑오브더락은 바깥 풍경을 정중앙에서 바라보는 느낌이면 써밋은 비교적 치우쳐져 있긴 하다. 차별화된 점은 포토존이 있다는 점이다. 섹션이 나눠져있고 구경을 다 하면 자율적으로 다음 섹션으로 넘어가면 되는 방식이었다. 첫번째 본 공간은 천장과 바닥이 거울로 되어있어 무한한 공간처럼 보이게 하는 곳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보고 있는 거울에 44번째에서 귀신 보인다고 하는 그 원리랑 똑같은 거였다. 커다란 은색 풍선이 잔뜩 있는 방도 있었다. 아이들이 주로 차고 놀고 있었다. 재밌어보여서 나도 해보려고 발로 소심하게 툭(진짜다.) 건드렸다. 공이 펑 소리 내면서 터졌다. 거기 있던 모두가 다 쳐다봤다. 직원분께 말씀드렸더니 원래 터지는 거라며 풍선의 잔해를 가져가셨다. 다른 직원분께서는 자연스럽게 새 풍선을 채워넣으셨다. 다행이었다. 근데 그 공간에 계속 있다보니 몇 분에 한 번 꼴로 터졌다. 이 전망대에서 한국인을 제일 많이 본 것 같다. 외국인들은 사진 구도를 신경 안 쓰고 찍어준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한국인분들께 필름카메라로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드렸다. 폰 고장났다는 내 말에 사진 찍어서 이메일로 보내주신다고 말씀해주셨다. 이 때는 필름카메라가 고장난 줄도 모르고 거절했다. 호의도 못 받아들이는 내 자신. 결국 여기서 남은 사진은 달랑 풍경 몇 장이다. 그것도 사진 절반이 다 깨져버린. 은색 풍선존에서 사진 남기려고 옷도 어울릴 만한 색으로 맞춰입고 왔는데 다 부질없었다. 우리나라만큼 외국도 인스타용 사진을 건지는데 미쳐있어서인지 혼자 구석에 앉아서 셀카 찍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나도 폰이 멀쩡했다면 그러고 있었겠다 싶어서 웃겼다. 써밋전망대는 아예 사진 찍으라고 포토존을 만들어 둔 곳이기에 사진을 찍을 수 없는 나는 여유롭게 즐겼음에도 40분 만에 다 둘러봤다. 탑오브더락과는 비슷한 풍경이지만 사진 찍는 공간이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써밋을 더 추천한다. 사실 맨해튼이 배경이면 꽃무늬 벽지도 예뻐보일 것 같다는 오바를 떨어본다.
이때 목이 너무 마르고 따뜻한 공원이 그리워서 행선지를 배터리 파크로 정했다. 지하철 역에서 나오자마자 건너편 스타벅스에 들러 우리나라에서 못 본 듯한 메뉴인 dragon drinks를 시켰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름을 물어보시길래 우리집 고양이 이름인 “로희!“라고 했더니 Romee가 되어 있었다. 마음에 들어서 이 날부로 내 영어 이름으로 정했다. 음료는 알갱이 씹는 맛이 있는 달달구리한 맛이었다. 배터리파크 간판이 안 보여서 지나가는 여자분께 입구를 여쭈어봤다. 운동 중이셨음에도 친절히 알려주셨다. 그리고 갑자기 제복 입은 아저씨가 와서 나보고 자기 nyc 소속이라며 자유의 여신상 투어 티켓 사라고 강매했다. 그 때도 나한테 도로 돌아오셔서 저런 거 다 사기라며 나를 데려가주셨다. 예쁜데 착하기까지 하셨다. 나 약간 사람 잘 보나보다. 다들 착하고 친절해. 인상이 성격 좌우한다는 거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 영화 ‘나홀로집에’에 나왔던 곳이라 기대했지만 막상 배터리파크를 둘러보니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공원이었다. 자유의 여신상도 저멀리 작게 보였고 볼 건 없었다. 그런데도 이 곳이 좋은 기억으로 남은 건 마음이 제일 편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연극 시작시간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아서 월스트리트 주변을 더 구석구석 둘러보기로 결정했다. 이 곳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휴대폰 고장난 날 지나쳤을 때 거리가 예쁘기도 했고, 미국 경제의 중심지에서 살아숨쉬는 경제를 느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주말이어서 관광객뿐이었다. 지도상 월스트리트에서 유명한 관광지들은 다 몰려있는 것 같아서 지도를 보지 않은 채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높다란 건물들을 구경하며 정처없이 걷다보니 맨해튼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와버렸다. 그리고 우연찮게 간 그 곳은 내가 뉴욕에서 본 곳 중에 손에 꼽힐만큼 예쁜 곳이었다. 유럽풍 분위기의 건물들을 지나 해리포터에 나올 것 같은 분위기의 건물들을 지나면 부둣가가 나온다. 브루클린 브릿지와 맨해튼 브릿지가 보이고 반짝이는 바다 뒤로 브루클린 전경도 보였다. 알려진 관광지가 아니라 한적했고, 앉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서 음식 포장해서 오면 너무 좋을 것 같았다. 다들 pier 17 꼭 들르세요. 그리고 오늘은 휴대폰이 고장났다는 상황을 받아들여서인지 세상이 다 좋아보이고 감정도 느껴졌다. 월가쪽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멀고 추웠다. 햇빛은 쨍쨍하고 따신데 여긴 건물이 너무 높아서 음지라 춥다. 너무너무. (어젯밤 잘 때도 추워서 전기장판이 정말 그리웠다.) 내 앞을 웃기는 폼으로 뛰어가는 남자분 덕에 혼자 엄청 웃었다. 안내 표지판이 잘 되어 있어서 ‘돌진하는 황소’도 보고 트리니치 교회도 봤다. 트리니치 교회 주변이 축축한 초록과 갈색빛으로 정말 예뻤는데 사진엔 안 담았다. 필카는 빛이 없으면 안 담기니까. 안내 표지판 보고 지하철도 잘 찾아갔다.
소호쪽도 가려했지만 내가 또 길을 잃을 걸 생각하면(필수 전제다.) 시간이 애매할 것 같아 안전하게 극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뉴욕 지하철은 주말에만 정차하지 않는 역도 있는데 그곳이 바로 내가 가야하는 역이었다. 불운이 가득했던 여행. 어쩔 수 없이 이전 역에 내려 걸어갔다. 생각보다 멀지 않은 거리였다. 이 날은 피자가 너무 먹고 싶었다. 땡기는 음식점이 안 보여서 식사를 미루던 중 내가 가고 싶어했던 joe’s pizza 가게를 발견했다. 불운이 가져 온 운! 그 joe가 그 joe가 맞는 진 모르겠지만 운명의 장난같았다. 가게는 조금 오래되어 보였다. 들어가자마자 직원이 친절하게 맞아줬다. 피자 한 조각이 한국의 피자 두 조각을 합친 크기였다. 직원분께 맛을 추천 받아 불고기+토마토+치즈 조합의 피자를 시켰다. 여기는 7달러 이상만 카드 결제가 가능해서 난 현금으로 계산했다. 앞전에 갔던 가게에서 “Keep the change”를 구사하셨던 아저씨의 멘트를 기억해뒀다가 나도 이 가게에서 써봤다. 셀프로 가게 홀 이용하면 팁 안 줘도 된다고들 했던 것 같지만 기억이 잘 안 나서 팁겸 드렸다. 근데 더 드릴 걸 그랬다. 주문한 피자에 어울릴 거라며 다른 테이블에서 가루도 직접 가져다 주시고 너무 친절하셨다. 서비스를 받는다는 기분을 절로 들게 해주셨다. 피자는 데워주시는데 함께 주시는 식전 빵이 너무 맛있었다. 가루 알고 싶을만큼! 하지만 여행 와서 입맛 잃고 거의 단식하며 며칠 지냈던 나는 피자 한 조각도 다 먹기 힘들었다. 특히 치즈가 조금 느끼해서 마지막에는 꾸역꾸역 먹었다. 피자 추천받은데다가 직원분이랑 마주보는 자리라 남기기도 눈치 보였기 때문이다.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피자집인 것 같았다. 점원의 스몰 토크가 너무 다정했고 sir이라고 부를 때 존중해주는 느낌이라 듣기가 좋았다. 미국에도 돈 던지듯이 주는 사람은 없는지 새삼스레 궁금해졌다. 아무튼 다 먹어가는 중에 할머니께서 합석하시겠다 하셔서 후다닥 먹고 내가 흘린 가루들을 치웠다. 피자가 넘 커서 접시째로 베어먹었는데도 다 흘려서 식탁이 넘 더러웠다. 뒷정리해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급했던 나머지 가루통을 올리다가 바닥에 한 번 떨어뜨렸다.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다. 이 글을 쓰는 현재는 이 곳이 내가 가고 싶어했던 유명한 joe’s pizza 가게는 아니였단 걸 알지만 직원분도 너무 친절하셨고 미국 피자를 맛보아서 기분이 좋았다. 피자도 계속 만들고 굽고 계셨다. 인기 많나보다. 주인 joe씨는 너무 지쳐보였다. 난 가게를 나오자마자 근처 마트에 물을 사러갔다. 여기도 대용량으로 과자를 파는 것을 보니 그냥 그게 기본 사이즈인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내가 대형마트만 가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여기서 점원분도 새치기한 아저씨 대신 내거 먼저 계산해주시고, 출구를 헤매니까 길도 알려주셨다. 서비스 강국.
학교 기숙사를 지나 텃밭을 지나 지도상 슬립노모어 극장으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했다. 간판이 없어서 서 계시는 여자분께 여쭈어보니 맞다고 하셨다. 10분 전부터 입장 가능하다셔서 허드슨강으로 일광욕하러 갔다. pier 66이었다. 강변 따라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달리기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한가로웠다.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도, 따듯한 햇빛도, 푸르른 잔디도 너무 예뻤다.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풍경을 보다가 또 일기를 적었다. 저멀리서 새떼가 날아오고 있었다. 우리나라 갈매기를 생각했는데 몸집이 공작 크기만 했다. 펠리컨인 것 같았다. 난 너무 놀라서 멀리 떨어진 벤치로 도망갔다. 아무튼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덕에 예정에 없던 야생 펠리컨도 보고 허드슨 강변도 와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것도 불운이 가져온 운! 숙소가 근처라면 강변 따라 한 번 쭉 걸어도 좋을 것 같다. 보이는 풍경은 뉴저지라 맨해튼 느낌의 높은 건물은 없지만 바다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햇빛을 양껏 충전하고 연극 시작 30분 전에 도착하니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50분부터 입장을 시켜주었기에 20분 간은 멍하니 기다렸다. 연극은 한국에서 미리 예매해뒀었다. 1시간 단위로 연극이 반복되는데 1시간이 지났다고 내보내지 않기에 첫 타임을 끊으면 연극을 3번 볼 수 있다고 해서 나는 제일 첫 타임을 택했다. 그리고 담벼락에서 양복을 입고 담배를 피던 남자분이 만화에서 뛰쳐 나오신 비주얼이라 혼자 배우분이겠거니 추측하며 감탄했다. 현지인은 민증을, 여행자는 여권을 검사했다. 참고로 이 연극은 무대가 건물 전체에서 각기 구성되어 있어서 어느 층에 가는지, 어떤 배우분을 따라가느냐에 따라 볼 수 있는 장면이 나뉜다. 관객이 직접 극장을 돌아다니며 관람해서 겉옷과 가방은 카운터에 돈 내고 맡겨야 했다. 여행 전에 대강 봤던 정보들이 기억났기에 4달러도 현금으로 미리 준비해두고 당황하지 않고 짐을 맡겼다. 이럴 때는 정말 쓸데없는 것을 잘 기억한다는 점이 좋다. 카드로도 결제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이름 말하고 예약 확인 후 입장했다. 카운터 직원분도 배우이신지 그 세계에 몰입해 계셨다. 미처 그 감성을 따라가지 못해서 웃음이 나왔다. 카드를 한 장 주시는데 이게 입장 순서고 가면도 나눠주신다. 카운터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니 밴드랑 바가 있었다. 할 게 없어서 안을 돌아다니며 어영부영 시간을 떼웠다. 내 카드 번호는 두번째로 호명되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니 계단이 나왔다. 다들 위로 올라갈 때 나는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간 사람이 나 포함 3명이었는데 내가 선두주자였다. 맥베스의 배경이 된 시대에 서로를 못 믿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내용이라 세트장이 깜깜한 분위기에 공포체험장 같았다. 겁 많은 나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한 발 딛고 아무것도 없는데 혼자 놀라서 뒤로 물러나고 그랬다. 내가 뒷걸음질칠 때마다 나를 따라오던 사람들은 뭐가 나온 줄 알고 따라 놀라셔서 굉장히 미안했다. 근데 벽난로가 있던 거실 같은 공간에 발을 들이자 어떤 남자분이 갑자기 달려나오셨다.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참고로 이 연극에서 배우들도 대사가 거의 없이 표정과 행동으로 연기하시기에 관객들도 대화 일절 금지다. 그래서 내적비명만 가능.) 암튼 알고보니 내가 연극의 스타트를 끊은 거였다. 관객 한 명만 있어도 연극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내가 본 첫 장면은 늙은 아저씨를 베개로 압사시키는 거였다. 진짜 베개로 얼굴을 꽉 눌러서 놀랐고 살해 후 죄책감에 울부짖는 연기를 하실 때 보는 내가 죄책감에 휩싸일 만큼 잘하셔서 놀랐다. 그리고 여자친구 아님 부인 같아 보이는 사람이 남편을 달래주고 탈의 후 함께 침대로 갔다. 자체 심의로 그 이후는 못 보겠어서 나왔다. 그리고 내가 도착한 곳은 광란의 파티 현장이었다. 조명이 번쩍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내 걸음도 내 앞사람도 1초 늦게 눈에 들어왔다. 시야가 확보가 안 되니까 무서웠다. 여기도 배우들 다 노출이 있었다. 유교의 나라에서 와서 조금 신선하게 다가왔다. 제일 소름돋았던 순간은 두려움에 떨며 울고 계시다가 관객을 농락하시는듯이 갑자기 광기어리게 웃는 모습이었다. 그 웃음에 홀려 그 분을 쫓아다녔다. 그러다 한 번은 배우가 없는 세트장에 갔다. 한 층의 절반이 나무가 미로처럼 되어있고 사슴 모형이 있는 숲이었다. 새소리만 고요하게 울려퍼져서 너무 무서웠다. 그 공간엔 나랑 한 커플뿐이었다. 길이 하나뿐이라 그 커플을 졸졸 따라갔다. 그 분들은 내가 계속 따라가니까 먼저 가라며 길을 비켜주셨다. 덕분에 그 무서운 공간에 앞장서서 가게 되었다. 경보로 그 숲을 탈출해 나가니 천장에 목이 다 따인 아기 인형 수십개가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방이 나왔다. 그리고 더 걸어가니 욕조만 일렬로 잔뜩 있는 공간이 나왔다. 이 층에 배우분이 안 오셔서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제일 기괴하고 무서웠다. 연령 제한이 걸릴 만했다고 생각했다. 공포의 집 못 가는 겁쟁이들은 사람 많은 곳만 쫓아다니시라. 마지막에 뵌 배우는 연극 제일 처음에 봤던 살해 당한 늙은 아저씨셨다. 돌아가신 게 아니셨다. 처음과 끝을 같은 분으로 마무리하니 이야기의 전말이 조금은 파악되는 듯 했다. 마지막 장면은 배우 모두가 큰 식탁에 둘러 앉아 만찬을 하는 장면이었다. 아무 일도 없는 듯 웃고 떠들지만 실은 서로를 의심하고 있다. 그리고 분위기가 과열되어 각자 생각하는 살해범을 지목하기까지 이른다. 슬로우모션 연기가 실감나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괜히 가면을 주는 게 아니였다. 가면을 쓴 우리 모두는 이 사건의 목격자이자 방관자였다. 3시간 내내 뛰어다녔음에도 모든 장면을 다 보지 못해서 흐름을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는 내가 세트장에 직접 들어와 있는 것이기에 배우들의 연기를 코앞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관객 참여형 연극이기도 해서 배우한테 눈도장 찍히면 연기를 같이 하기도 한다. 나는 어떤 배우 졸졸 따라다니다가 간택당할 뻔했지만 부담스러워서 일부러 피했다. 후회중이다. 한 분만 계속 쫓아다니고 맨 앞에 있으면 기회가 있다고 하니 다들 도전해보길 바란다.
밖을 나오니 깜깜한 밤이 되어 있었다. 이제 진짜 여행 끝물인 것 같아 아쉬움이 절로 들었다. 종일 걸어서 다리는 아팠지만 추억을 더 남기고 싶은 욕심에 무작정 걸었다. 허드슨 백화점이 주변에 보여 들어갔다. 대리석 바닥에 깔끔하고 비싼 백화점 같아보였다. 외국 h&m은 어떨지 궁금해 구경했다. 옷이 더 화려할 줄 알았지만 우리나라랑 똑같았다. 백화점 옆에 재개발 프로젝트 일환으로 만든 독특한 형태의 구조물인 ‘베슬’도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서인지 노란 조명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그 앞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행복하게 웃는 가족들을 보니 크리스마스날 따뜻하고 단란한 가정집을 훔쳐 본 성냥팔이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안 쓰는 기찻길을 개조해 공원으로 만든 ’하이라인‘도 주변에 있어 들어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가 발견한 출입구를 서식지 보호차 막아뒀다. 하이라인은 포기하고 첼시마켓에 가려고 걷다가 길이 외지고 무서워서 포기했다. 그렇게 어디로 향하는 지 조차 모른 체 걷다보니 원점이었던 허드슨 백화점에 다시 도착했다. 도심이라 조금만 걸으면 지하철역이 나오겠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지하철역을 찾아 깜깜하고 인적이 드문 길을 한참 걸었다. 무서움보다 지쳤다는 생각이 더 컸다. 날은 춥고 지하철역은 안 보이고 발은 아픔을 넘어서서 절뚝거릴 지경이었다. 도저히 못 걷겠다는 생각이 들어 버스정류장 의자에 퍼질러 앉았다. 지도를 보니 지하철역을 못 찾는 게 아니라 지하철이 안 다니는 곳이었다. 넘 체력적으로 힘드니까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넘어서서 죽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로 눈이 돌아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겨우 지하철역을 발견했다.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맞은편에 앉은 아주머니들이 나보고 웃으셨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잠들었다가 무사히 내렸다. 이 날 필름도 사려했는데 도저히 몸이 안 따라줘서 숙소로 곧장 갔다. 또 아파트 현관문이 안 열렸다. 이 날은 너무 힘들어서 현관에 주저앉아 욕을 했다. 그러다가 아파트에서 누가 나온 덕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코트를 바닥에 깔고 그대로 1시간 잤다. 씻을 때 온수가 안 나와서 또 화가 잔뜩 났지만 어찌저찌 씻고 또 바로 잤다. 정말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