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향유하는 복된 여생을 간절히 바라며
"나의 인생은 부지런했으나 게을렀고, 치열하게 살았으나, 한없이 나태한 삶이었다.
대부분의 시간들을 현명하게 처신했다 생각했으나 문득 떠오르는 어리석은 선택들이
잠을 설치게 하기도 한다.
부끄럽지만 책을 가까이하지 않은 시간의 크기는 거대했고 그 부피만큼 나는 경솔했고,
충동적이었으며, 황폐했고, 불행했다.
'인생을 관조할 여유가 없었던 나이'라고 자위하기에는 '세속적 성취'도 보잘것없기에,
남들이 보고 듣지 못하는 어디라도 가서 '자성과 반성'의 '절규'를 쏟아내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보직 해임' 통보를 받았을 때를 회상해 본다.
만약 누군가 그 당시 '인터뷰'를 요청했다면 아마도 이러한 '자기혐오'식의
'서면 답변'으로 '격정'의 심정을 토로했으리라.
꽤 오랜 시간 동안 이러한 '자기혐오'의 감정이 나를 지배했는데, 사실 그 실체는 '나의 효용가치'를 부정한
'조직'에 대한 강한 분노와 혐오였다.
주위에게는 세상 쿨하고 칠(chill)한 사람으로 '당연한 조직의 생리', '후배에게 양보' 등을 운운하였지만
내 심연의 의식에는 '능력 있는 나를 내치는 거지 같은 조직, 어디 잘 되나 보자'라는 고약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겠다.
많은 이들처럼 나에게도 '회사'는 '유일하고 절대자인 항성(恒星)'이었고, 나는 '한 치의 오차 없는 궤도를 도는 행성(行星)'이었을까.
경영대학을 졸업한 필자의 어릴 적 꿈은 이름깨나 날리는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아이러니 속에서 난 일반 직장인과 다를 바 없는 작은 방송국의 프로듀서가 되었고,
'살아가는 것'의 '거대한 관성'에 나의 치기 어린 꿈은 가뭇없이 멀어지고 말았다.
가정을 이룬 후 '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나는 대기업 홈쇼핑 플랫폼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나름 '커다란 시스템의 궤도'에 올라탄 것이었다.
기억조차 희미한 '나의 꿈'과 영원히 작별한 대신 다소 풍족해진 물질의 혜택을 얻었고 사랑하는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그렇게 17년이란 세월 동안, 무한궤도를 달리는 열차의 '부품'으로, 소모되고, 마모되고, 결국 버려졌다.
'부품으로써의 내구력'이 아직은 괜찮고, 적어도 외면으로는 성실하고, 꽤나 큰 성취를 이루어냈다는 평가를
받았기에 '궤도 이탈'은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유일한 세계', '유일한 궤도'에서 이탈하고 내쳐져 황망하고 두렵고 절망적인 심정에 눈을 뜰 수 없을 때.
요란한 굉음 소리가 이제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텅 빈 시골역 대합실에 나만 홀로 '한동안' 남겨졌을 때.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고, 풍경은 그대로였다. 나는 또 다른 '세계'와 '궤도'를 찾는 준비를 빠르게 마친 것이다.
나는 이제 잘 보이지도 않게 작아진 '나'를 다시 찾고 있다. 서러웠던 마음을 들어주기 위해 귀를 기울인다.
먼지를 털고 나사를 조금 조여주면 아직은 '쓸만한 작은 나'는 남은 여정의 새로운 주인공이다.
작가 임어진은 저서 '궤도를 떠나는 너에게'에서 익숙하고 길들여진 '궤도'를 떠나는 모든 이들을 다독이고 위로한다.
"궤도를 도는 행성처럼 우리는 제각각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엔가 붙들려 있을 때가 많은데,
중력 같은 힘이 우리를 지켜 주는 경우도 있고 헤어날 수 없는 굴레인 경우도 있다. 우리 각자는 어떤 궤도를
돌고 있는지, 그 궤도를 지키거나 떠난다는 게 무엇일지, 떠나는 이들의 변화와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이탈'되며,
그제야 진정한 '인생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이제라도 '사유하는 삶', '예술을 향유하는 삶'의 방향으로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라는 신형철선생의 말처럼 '궤도'를 이탈함으로
그제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독서하고 사유하게 된 이 기적과 같은 '인생의 선물'에
이제 나는 기꺼하며 또 하루하루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