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의 아름다움
책을 팔아서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겠다고 누군가에게 말했던 2019년의 어느 때를 생각한다. 어렵고 또 어려운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해결이 되었고 꼭 때마다 한 사람이 나타나곤 했다.
코로나가 어려움을 줬을 때도 한 사람씩은 있었다.
"나는 그때 이후 돈을 벌지 않은 적이 없었고 동시에 손에서 책을 놓은 날이 없었다. 모든 일이 내게 스승이었다. 성공하고 실패하며 복기하고 반성하는 과정이 나쁘지 않았다"p226
지금 나의 삶에 웃음이 나온다.
돈을 벌어야 하는데 열심히 하는 일이 드디어 마이너스에 도달한 인생이 된 경험은 또 처음 해보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려웠어도 그날 먹을 것 정도는 벌었는데 이젠 열심히 살아도 안 되는 경우가 있고 얼마나 그동안 내가 운이 좋았는지,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었는지 복기하게 된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이제 이곳은 사라져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아니 서지도 못하고 퇴장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새롭게 만났고 나를 응원해 주고 또 다른 문이 열리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하루를 마치고 밤에 오늘을 돌아보는 것"p226
이렇게 하루를 살고 내일을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둘째 형제는 아버지를 닮아 음악성이 있었다. 악보를 보지 않고도 한 번 들은 곡을 연주했던 아버지처럼 그도 음을 감각으로 찾아냈다. " 그 형제가 운지법이 맞지 않아 힘들어할 때 " 오빠, 세상에 표준은 없어 내게 맞는 게 표준이야." p228
공원의 벤치에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보며 세상의 포용을 생각하고 오른쪽 손가락 두 개를 잃은 형제의 동생이 아니라 누나로 가정해 보는 그 시간.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시간에 앉은 벤치의 홀로 외롭고 서러운 시간. 그 계절은 지금처럼 팔뚝에 이른 스산함이 다가오는 추석 전 가을이었을까?
세상의 표준이 아닌 내게 맞는 표준을 말한 속 시원한 가치관에 짜릿할 수 없고 나는 울 언니가 챙겨둔 음식과 사과 한 박스 배 한 박스와 함께 추석 명절을 보내던 여러 해를 생각한다. 바닷가를 목적 없이 걸으며 지는 노을을 바라보던 그럴 때 마음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이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은 기적이다."p231
맞다. 그리고 책이 내게로 오는 운명은 구원의 기적이다.
"나는 그 어떤 것도 해결하러 오지 않았다.
나는 너와 함께
노래하러 왔다"
<모두의 노래>에 수록된 '나무꾼이 자에서 깨기를' 중...
8월 20일 한평 북콘서트는 함께 부르는 노래였다.
"우리 안의 모든 소수자를 응원하고 싶다" p246
나는 내 한쪽 방에 보트피플 작가 캐나다의 킴 투이의 책 3종을 담았다.
일터와 가까운 은평구로 이사를 오려고 했을 때 결정의 동기는 구파발 성당 제대 뒤 추모관이었다.
어디에 가든 가까운 성당을 찾아 앉아있던 습관이 있었다. 사람들이 제대 옆쪽으로 들어오고 나가고 아주 조용한 시간 나 홀로 앉아 있었는데 간혹 울음소리도 들리곤 하는 거였다. 궁금한 채 그냥 갈리 없는 나는 그곳으로 가서 열린 문으로 연결된 통로에 들어섰다. 그리고 적어도 두세 시간은 머물렀던 것 같다.
그곳에 있는 모든 이를 읽으며 만났던 그때가 있었다.
나는 이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현충원에 가려고 한다.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면 햇살이 내 얼굴에 내리쬐며 광합성을 일으키고 바람은 내 머릿결을 쓰다듬는다. 한 잎만큼의 여유다." p248
"동작동 현충원의 사계는 아름답다." p249
"나는 영화 <탄생>으로 박흥식 감독이 드디어 임계점을 넘었다고 생각한다. 시대도 사람도 마그마처럼 쌓이고 쌓이면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 인간보다 주자가 힘이 센 시대가 있었듯 지금은 자본이 힘이 센 시대이지만 나는 인간이 먼저인 세상이 반드시 오리라 생각한다."p257
임계점이 넘은 영화를 보면서 나도 한 층 더 쌓이길 바라며 이미 인간이 먼저인 미오기언니에게 나는 이미 그런 세상을 보았다고 말해야겠다.
"거리에 '기묘한 낙관주의자'들이 걸어 다니고 있다"p263
"사람들은 전시에 자살하지 않는다고 한다. 절대 고독의 죽음. 그 대척점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p264
그때 단 한 사람이 구원한다. 평생을 구원해 주는 보통의 '엄마'같은 사람이 없는 사람은 인생의 단 한 번 씩의 '구원'을 모아 가슴에 새겨 둔다.
"나는 타인의 도움으로 살았다" p272
울 언니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세상에서 만났던 은인들의 마음을 차곡차곡 모아진 토양 위에 내 마음의 사랑이 피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세상을 헤쳐나갔던 힘은 밥 한 공기의 힘이었다."p272
나도 그렇다. 진짜 그 마음. 내 마음이 알아채는 진짜 그 사랑들.
"고맙지만 얻어먹는 삶이라는 자괴감을 줘서는 아니 된다. 만약 내게 밥을 주었던 그 언니가 동네방네 '굶어 죽어가는 것을 내가 살렸다'라고 유세를 떨었다면 나는 적개심을 품었을지 모른다." p274
나도 그렇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라고 내게 말했던 그 목소리와 온화한 표정의 고마움으로 살았다.
"나는 지금도 내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산다"p275
"커서 우울할 때는 연필을 깎았다. 그리고 편지를 썼다..... 사라지는 것들을 사랑했다"p277
"세상을 사는 것은 연필처럼 제 몸을 깎아내는 일이었다."
"나의 연필로 쓰인 문자가 구부리고 펼치고 넘어지며 마침내 날아올라 결승이 되어 그대를 묶게 되기를. 다음 생을 넘어 다다음 생까지 나의 문자가 당신을 기억하기를.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 햇빛 유리가 어떻게 내 눈을 찔렀는지 당신의 나의 하루를 알아주기를.
어떤 것도 너무 힘을 주어서는 안 된다. 편지는 점점 옅어지고 흐려져 힘을 준 자국만 남을 것이다. 사라짐은 아름다운 일이다." p278
이 책은 내게 연필로 쓰인 글이었다. 연필로 쓰인 문자가 구부리고 펼치고 넘어지며 마침내 날아올라 나를 일으켜 세웠다. 삶과 생이 여전하지만 나는 일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