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탄생 100주년 고흥 특별전
고흥을 다녀와서
고흥 1박 2일 여정을 보내고 돌아왔다.
영화 『탄생 』의 감독님도 함께 하신다는 여정에 감사한 마음과 그 어떤 직관으로
대답은 혼쾌하게 했으나 출발 계획을 수시로 고민했다.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면 멀미를 하는 내 인생의 고질병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체버스를 타고 다니며 걷기를 했던 프레시안 인문학습원에서는
두 얼굴의 여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버스에서는 희놀롤 창백한 얼굴로 운전기사님 바로 뒤에 앉아 엎드려 있다가, 목적지에 도착해 내려 조금만 걸으면 세상 천국인 얼굴이라고 해서 붙여졌다.
기차를 검색하고 자가운전을 고민해보고 '나만의 여행'을 추가해 천천히 둘러둘러 가는 방법도 생각해보고 했지만 이미 잡힌 일정과 형편, 교통의 불편함으로 "에이 모르겠다" 하면서 동승을 했다.
의외였다. 이번 고흥 여행은 다른 사람 차를 타고 멀미를 안 한 첫 장소이다.
차 냄새도 전혀 없고 브레이크 밟는 느낌도 없이 소음도 없었다.
책방에 묻혀 산 뒤에 나온 책방 세상은 한 세기 문명이 바뀌었는지 차의 부드러움이 낯설었다.
경력단절여성들이 세상에 재도전할 때 움츠러든 모습을 많이 보곤 했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40대 이후 책방 안에서만 살며 책방에 오는 사람만 만났던 세월을 살다가
50대가 되어 다시 보는 세상에서 문명의 변화를 체감했다.
책방 속 세상도 잘 살았다.
비록 가난의 바닥을 경험하긴 했지만 현금화되지 않은 것들의 부자가 되었다.
인간에 대한 공부, 나 자신에 대한 앎, 평범한 사람들의 숭고한 마음은 평생 사라지지 않는 재산이 되었다.
이제 길 위에 선 책방으로 여정에 나선 내게 고흥은 인생의 중심에서 다시 뒤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성당의 붉은 벽돌건축, 수녀님의 올겐소리, 제대 앞의 꽃꽂이, 성체전례의 종소리,
댕댕댕댕 울렸던 삼송기도 소리와 성당을 오가는 길에 만났던 바람의 소리.
이런 향유 속에서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조금씩 자라던 문화예술에 대한 호기심이 있던 아이였다.
이제 나는 나이 많은 어른이 되어 어느새 대가들과 함께 1005호 거실바닥에 앉아 '들리는 소리'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 어린아이를 고흥에서 만났다.
1박 2일 숙박 동지가 된 사람들과 나누고 본 많은 이야기는 또 다른 어른을 생각나게 했다.
제주를 놀러 가면 묵곤 했던 친구(이제 90 정도 되셨을까..)와 함께 제주 첫 올레 개장행사에도 갔고 성지순례도 가고 어느 날은 또 다른 제주 친구집에도 가고, 어느 날은 모슬포항의 방어회도 먹으며 나눴던 추억들이 있다. 어느 날 나 홀로 올레길을 걷고 온 후 들어오는 길에 사 왔던 막걸리와 함께 친구 남편 할아버지와 함께 밤새 제주 4.3 이야기를 들었던 시간들..
그때 녹음을 해두었으면 좋았겠다는 후회를 해왔던 터라 이번 여행에서도 다가올 미래에 또 같은 후회를 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대신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뿐만 아니라 뇌도 작동시키려 애썼다.
호기심에 듣게 된 박감독님의 시나리오를 쓰기 위한 전후과정의 치밀했던 시간들을 만났다. 한국천주교회사 공부도 해본 나도 질문해보지 못했던 질문을 통해 찾아낸 역사적 시각.
잔잔히 전해 들은 이야기 속에서 발터 벤야민과 피터 한트케의 생각을 녹여내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잠시 어느 해 정독도서관 <발터 벤야민> 학회에 참석했던 어느 주말 종일의 시간들을 떠올렸다.
내 고향 목포는 기차의 종착역이었다.
천경자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있던 고흥은 기차가 없는 외로운 곳이다.
기차가 없는 곳은 내게 막막한 곳이다.
인구가 없고 상업 수준이 떨어진 곳일수록 단 한 명을 위해서라도 기차 한 대는 다녀야 한다.
건설교통부는 전국을 효율로 따지지 않고 기차 수단만큼은 국토만 보고 균형을 맞춰주면 좋겠다!
아무리 천경자의 고향 고흥에서 특별전을 한다고 한들 서울에서 얼마나 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작가님, 예술가, 영화감독등과 함께 한 자리에 돈 대신 시간을 쓸 수 있는 마침 좋은 기회가 주어진 행운이었지만 모두가 이런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사한 마음이 들자 미안한 마음이 따라오는 고흥의 시간들.
그럼에도 꼭 고흥을 가보면 좋을 것이다. 천경자 화백을 만나고 떠나는 길 유자나무 몇 그루 그 탐스러움이 잘 가라고 인사를 하는 소리도 꼭 들어보시길 바란다.
아침에 일어나 페터 한트케의 중편소설『어느 작가의 오후 』를 다시 읽으려고 펼쳤다가 첫 장에서 바로 멈추고 이 글을 적는다.
"언젠가, 거의 1년 동안 언어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이래로 작가에게는 자신이 과거에 썼고, 앞으로 쓸 수 있다고 느낀 문장 모두가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말로 표현되지 않고 글로 쓰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언어가 그로 하여금 깊이 숨을 쉬게 했고, 그를 세계와 새롭게 맺어 주었다. 그날은 그러한 행복한 글쓰기로 시작되었고, 아무튼 그는 다음 날 아침까지 자기에게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p11『어느 작가의 오후 』 페터 한트케 <열린책들>
그 어렸던 아이는 새로운 현재에 들어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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