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그냥 Dec 28. 2017

근사한 서비스는 언제쯤 기획할 수 있을까

초보 기획자의 조바심과 불만 그 어디쯤에서

저는 이런 기획을 해보고 싶습니다


  첫 기획업무를 할당받은 한 신입 기획자는 이런 말을 했다. 본인이 원하는 기획 서비스는 이런 내용이라며 예쁘게 제안서도 작성해서 하고 싶은 일을 가지고 왔단다. 당차고 당당한 신입 기획자의 기백에 만화나 드라마였다면 빠밤 하고 OST라도 깔아줘야 했겠지만, 선배들의 마음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조급하다. 하지만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간다.

 내가 신입이던 시절에 나도 그랬다. 난 용기가 없었기에 저지르지 않았을 뿐이었다.   역시 신입시절에도 항상 욕심이 많은 편이었다. 이성적으로는 아직 모르는 것이 천지라고 말은 했지만, 마음은 뭔가 그럴듯한 것을 빨리 기획하고 싶었다. 증명해 보이고 싶었고 어설프게 자신감도 있었다. 요즘처럼 대학에서 UX나 웹 기획에 대한 이론을 많이 공부하고 왔다면 내가 느꼈던 마음의 한 열 배 정도 더 열정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열정적인 신입은 지금 상황이 답답하겠지만, 물론 어찌어찌 조직의 중간까지 올라오니 선배들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드라마의 기획과 실제 회사에서의 기획은 다소 다르니까.


 나는 고객에게 큰 영향을 줄 멋진 서비스를 만들고 싶은데
왜 나에게 고작해야 텍스트나 고치고, 배너구좌나 붙이라고 하는 걸까?


 그 갑갑함. 왜 나를 제대로 알아봐 주지 않을까 하는 불만.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조금 허물어진다. 당장 주어지는 것과 배우게 된 것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으니까. 그 시기에 대해 누군가는 현실에 순응해서 꺾였다고 표현하고, 누구는 포기한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기획자의 일반적인 궤도에 올라탔다고 말하고 싶다.


 근사한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싶은 조급함이 자꾸 든다면, 아래의 질문을 꼭 기억해봤으면 좋겠다.





첫째, 만들려는 서비스의 비즈니스 레벨은 어떤 위치인가?


 지금 그 조급한 마음이 향하는 서비스에 대해서 정의부터 해보자.

 아예 신규 비즈니스인가? 아니면 그냥 신규 서비스인가? 그것도 아니면 프로모션 수준? 아니면 단지 개선인가?  아니면 애초에 이게 무슨 말인지조차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아직 좀 더 배워야 하는 시기다.


 서비스 기획에는 3가지 영역이 있다. 비즈니스, UX, IT 이 세 영역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이에 대한 경계를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한 아이디어는 이 세 가지 영역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서 서비스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머리 속에 떠오르는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바로 개발로 연결 지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럴듯한 서비스'를 기획하려면 진짜 이 회사의 비즈니스가 굴러가기 위해 조직 내의 이해관계를 알아야 하고, 누가 봐도 뻔한 방향이 아닌 사용자도 잘 몰랐던 방향을 잘 짚어줘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현 가능한 기획안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 자신이 중간에 뛰어든 이 회사의 전반적인 전략과 방향성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핵심을 찌르는 개선인지 아니면 그냥 사이드 곁다리 프로모션인지 구분할 수도 없다. 또한, 이미 기존 서비스 곳곳에 흩어진 내용들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기존 비즈니스와 차이 있는 신규 비즈니스인지 아니면 신규 서비스인지 구분할 수도 없다.


  얼마 전 한 인턴은 기획 과제로 정말 거대한 기획안을 제출했다. 온라인에서 식재료를 구매하면 오프라인 매장에서 조리된 상태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 친구는 O2O 서비스라고 설명했다. 언뜻 보면 쇼핑몰에서 물건을 구매하니까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지금 쇼핑몰 비즈니스와 사업구조에 대해서 알았다면 이건 신규 서비스라고 설명하진 못했을 것이다. 이건 기존 비즈니스의 영역을 벗어나는 신규 비즈니스에 가까운 사이즈였다.

 또한, 아이디어 수준에서 그쳐버렸다. 오프라인 매장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식재료를 조리하고 서빙하는 인력 등 매장에 대한 아이디어가 넘쳐난 것은 훌륭한 아이디어였지만, 실제 온오프라인의 시스템을 연결하고 관리하는 거대한 프로세스는 고려되지 않았다. 아마도 기술적인 시스템에 대해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상되는 운영비용을 마케팅을 통해서 수요를 높여서 해결하겠다고 했는데, 그 방법으로 유명 셰프를 기용하는 등의 프로모션으로 대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이해와 설계 수준이 높지 않았기에 일어날 수 있는 상상이었다.

 나는 이 인턴 친구의 아이디어나 능력이 부족하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자신의 아이디어를 평가하고 다듬어서 실제 구현할만한 전략안을 짜기에는 이 기업의 논리와 현재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생각하는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무엇을 고려하고 무엇을 기획해야 실현 가능한지 그 자체를 몰랐다고 생각한다.


  건방진 신입이던 나 역시 입사 후 7년의 시간 동안 이 거대한 회사 조직이 만드는 비즈니스를 구석구석 익히고 체화해야 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배워야 하는 것들이 더 보였고, 하나의 프로덕트를 만들기 위해 정리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될수록 조급함보다는 하나라도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겉모습의 레고 블록의 외형이 아닌, 그 레고 블록의 외양을 지지하는 내부 구조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눈이 점점 더 커져왔다고 생각한다.



둘째, 당신은 디자인 또는 개발과의 협업이 가능한 사람인가?


 앞서도 말했듯이 무언가 서비스를 기획한다는 것은 '그림'과 '상상'에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영부영 작성한 기획서를 개발자에게 넘겨준다고 뿅 하고 결과물이 내 맘에 들게 나올 수는 없다. 그런 방식으로 일이 가능했다면 우리 프로젝트는 개발자와 일할 게 아니라 영화 '제5원소'에 나오는 전자레인지 정도는 있었어야 한다. 알약만 넣어도 뿅 하고 완제품이 나오길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편리함은 이 세계에 없다. 아니, 있어서도 안된다.


 

영화 <제5원소> 에  나오는 전자렌지 캡쳐


   기획자가 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작업이었다면 기획자라는 존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모든 업무가 개발자와 비주얼 디자이너와 같이 기술이 있는 사람들 위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자들이 기획자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는 이상, 실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완성되기 위해서 기획자는 필요하다.


 기획자의 역할이 국내만의 역할은 아니다. 최근 Udacity를 통해 페이스북의 Product Designer들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Art나 IT기술 그 자체만으로는 프로덕트를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이를 적절히 사용자의 니즈로 연관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이나 기준을 마련하는 역할을 해내야 함을 강조했다. 국내에서는 이런 직무를 UX기획자나 서비스 기획자라고 부르고 R&R의 범위가 다소 다르더라도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기획자의 가장 큰 업무는 '프로듀싱'이다. 기획자 모집 공고에서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다. 나중에 다른 글에서 좀 더 다루겠지만 전문인력인 디자인과 개발자의 언어를 모두 이해하지 못해도 대화가 되는 ‘상의 가능한 협업 상대’가 되지 않으면 처음에 기획한 비즈니스와 UX에 대한 사고를 모두 만족시키는 팀을 만들어 나가기 어렵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상호 경험을 통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스티브 잡스 같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비스 기획자라고 해도, 애초에 디자이너와 개발자의 커뮤니케이션과 신뢰가 없었다면 아이폰의 혁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로가 신뢰가 있는 사이가 되려면 팀으로서 작은 프로젝트부터 함께 해나가야 한다. 이 신뢰는 기존 서비스에 대한 지식정도나 업무자를 대하는 태도, 이슈 조율 방식 등 다양한 요소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신입이 아니라 경력 입사자라도 겪을 수 있는 문제다.


 당장 개발자에게 자신의 기획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개발자의 질문을 전혀 예상할 수 없다면? 그리고 나의 기획에 협업 대상자들과 자연스럽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신뢰가 형성되어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아직은 조급하지 않아도 될 때다.




셋째, 기획 아이디어를 발의할 수 있는 조직인가?


  앞의 두 가지 질문에서 자신 있게 OK라고 말할 수 있다면, 개인적인 준비는 다 되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 질문은 조직에 대한 질문이다. 아무리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도, 아무리 아이디어가 넘쳐나도 소속된 조직의 특징에 대해서 파악할 수 없다면 자기 마음에 드는 기획을 해볼 시점을 찾기가 어렵다.


 조직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제품 생애 주기와 조직 운영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Product에는 크게 2가지 단계가 있다. 바로 구축과 운영이다. 신규로 서비스를 구축하거나 이미 구축된 서비스를 운영하는 중이거나. 둘 중에 하나다.

 단언컨대 처음 시작하는 기획자가 오로지 기획 역할만 가지고 신규 구축을 진행하는 프로젝트에서 단독으로 활약하는 일은 거의 없다. 본인이 다 기획한 듯 말하는 스타트업 CEO라고 해도 개발자든 디자이너든 영업 이든 간에 경력이나 경험 많은 리더가 분명히 존재해야만 실전에서 활용 가능한 실질적인 정책과 서비스 기획의 기준을 마련할 수 있다. 그게 없다면, 그건 서비스를 유지할 스타트업이 아니라 엑시트 전략만을 고려한 스타트업이라고 단언한다. 비즈니스 분석과 정책은 서비스 기획의 근간이 된다.


 구축 시기의 가장 큰 부분은 기본기다. 린 UX에서는 MVP(Minimum Viable Product)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다르게 말하면 구축 시기에는 이미 그 자체가 MVP를 만드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것을 떠나서 새로운 기획을 한다거나 할 수 없다. MVP의 구성요소를 만드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금 제안하고 싶은 그 서비스가 MVP를 구축하는 것에 꼭 필요한 것인가?

 꼭 필요한 거라면, 제안을 해라. 그다음은 리더가 결정해줄 것이다.




  이미 개발되어 운영되고 있는 서비스는 조직에 따라서 2가지 운영방식이 존재한다. Roll-driven,Rank-driven이다. Roll-driven 방식은 보통 한창 성장 중인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많이 발생하며 모든 구성원이 분산된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개개인의 R&R보다는 회사적 전략을 공유하여 함께 일해나가는 방식을 의미한다. 반대로 Rack-driven은 보통 대기업에서 많이 사용되는 방식으로 상위의 결정권자에 의해 우선순위가 정해지고 업무를 받아서 진행하는 형태를 말한다.

 (Roll-driven과 Rank-driven 조직에 대한 더 자세한 이해에 위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고하세요.

 개발자 기준의 글이라 기획자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https://brunch.co.kr/@svillustrated/12



 조직의 운영형태에 따라서 신규 서비스를 기획할 수 있는 의사결정권자가 달라진다. 그저 기획서를 만드는 것을 떠나서 '설득의 대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기획의 목적은 기획 자체가 아니라 구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현을 위해서는 빠듯한 내부 자원을 분배해야 하고 회사 규모가 크고 운영 서비스가 크면 클수록 자원 경합은 치열해진다.

 내가 기획한 서비스는 이 자원 경합에서 이길 수 있는 설득력이 있는 서비스인가?

 Roll-driven이라면 정말 이 기획에 동의할 사람을 얼마나 모을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기획 방향에 동의할 사람이 많아진다면 나의 부족한 점까지도 그들이 매워줄 수 있다.

 Rack-driven이라면 의사결정권자가 이 서비스 기획을 지원하도록 의사결정권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동의한다면 그렇다면 엄청 좋은 인력을 붙여서라도 지원을 해줄 것이다.




  처음 기획 일을 시작할 때 스티브 잡스가 되고 제프 베조스가 되고 싶은 조급한 마음은 모두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에게 왜 그럴듯한 기획업무가 주어지지 않는지, 혹은 내가 먼저 제안한 멋진 기획이 왜 무시당했는지를 생각하려면 우선 감정적인 것은 다소 내려놓아야 된다.

 건방졌던 나는 '나를 몰라주나'라고 생각했고 '조직이 한심해서'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일하면서 세상이 이렇게 넓고 이렇게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계속 깨달으며 자신이 깨지는 시간을 지내왔다. 그 과정에서 아이디어나 고객 같은 불만이 기획이 되고, 서비스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먼저 준비가 되고 조직의 형태를 적절하게 파악해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설득력이 있는 아이디어와 구현 가능한 기획이라면 언젠가 자신의 역량이 그만큼 될 때, 분명 좋은 사람들과 기회는 찾아온다. 그전에 서비스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같이 할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고, 조직에서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만 된다면, 생각보다 만족할만한 서비스를 만들어볼 기회는 재빨리 찾아왔던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