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인 마음과 이타적 행동
인간의 본성에 대한 연구는 어느 시점에나 가장 심오한 주제로 다뤄졌다.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에 대한 주제는 결국 인간은 이기적인가 그리고 이타적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져왔다. ‘나’라는 한 개인이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에 대해서 정의하기 위해 먼저 ‘인간’에 대한 보편적 관점에서 의견을 먼저 정리하고, 이후에 개인적 관점에서 판단해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각 어휘의 명확한 어휘부터 정의해보자. 네이버 국어사전은 ‘이기적’이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이타적’이란 ‘자기의 이익보다는 다른 이의 이익을 더 꾀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즉, 이기적과 이타적이란 행동의 결과 혹은 행동의 목적이 ‘나의 이익’이냐 ‘타인의 이익’이냐는 부분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행동의 목적으로 보는 이타성
먼저 행동의 목적에 대한 부분부터 생각해보려고 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1990년 출시간 베스트셀러 <이기적 유전자>는 이러한 이타적 행위가 사실 유전자 복제를 하는 생식을 위한 행위라고 주장한다.[1] 유사한 관점에서 사회생물학을 창시한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의 이타적 행동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이기적 목적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타적 행동을 강조하는 인간의 행동규범과 윤리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지침이라고 강조한다.[2] 매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는 ‘반복호혜성'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며 인과응보라는 논리로 이타성을 설명한다. 즉, 이타적 행동이란 언젠가 상대방이 나에게 돌려줄 이타적 행동에 대한 기대라는 장기적 이해타산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가지 관점은 이타적 행동의 심리적 이기심을 바탕으로 한다. 즉, 이타적 행동을 한다고 해도 이타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없고, 이기적인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완전히 순수한 마음의 이타적 행위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기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성서학에서는 인간의 이기성은 영적인 순수함을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인간 스스로 진정한 이타적 행위를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강조한다. 즉, 신앙을 통해서 행위의 주체를 자신에게서 하나님이라는 이타적 영적 존재로 바꿀 때 비로소 이타적 행위가 가능함을 강조한다.[3]
하지만 이와 같은 설명은 여전히 맹점이 존재한다. 종교라는 것은 원래 기복신앙과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출현하여 사회 질서의 유지를 위해 이용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규약으로서의 종교는 결국 사회생물학적 이타주의에 대한 해석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성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행동의 결과로 보는 이타성
그렇다면 이번에는 행동의 결과를 중심으로 인간의 이타성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우리 사회의 형태를 규정하면서 이기적인 인간의 성향을 규정하고 있는 학문이 하나 있다. 바로 경제학이다. 경제학은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대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경제적 인간’이다. 자본주의에 속해 있는 우리 사회는 아동기때부터 시작하여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경제학 교육을 통해 합리적인 경제주체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육성하려고 노력한다. 사회교육학회의 두 연구자는 경제 교육이 인간을 더 이기적으로 만드는 것인지에 대해서 연관관계를 연구하였는데 개인의 합리성이 강화되지만 사회적 합리성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유의미한 관계가 있다고 밝혔다. [4]
이 주장은 2가지 관점에서 생각의 여지가 있다. 첫째, 인간은 아무리 경제적 교육을 받는다고 해도 고전주의 경제학이 상정하는 완벽한 형태의 ‘경제적 인간’이 되지 못한다. 행동주의 경제학은 바로 비합리적인 인간의 특징을 나열하기 위해 등장했다. ‘사랑’이나 ‘호감’과 같은 비경제적인 영역에서는 도리어 궁극적인 이타적 행동도 가능할 수도 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두 번째로 생각해볼 문제는 개인의 경제적 이익에 대한 합리성이 보장된다면 이타적인 결과를 가져올 행위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연말정산을 더 받기 위해 고민을 하다가 매달 5만원의 돈을 아프리카 어린이를 위해서 기부하기로 한 행위를 생각해보자. 실제 연말정산 혜택을 받는 것은 분명 경제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이 있는 행위라고 보일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행위 자체의 선택은 명백히 이타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사회생물학과이나 호혜주의와도 관계없는 관용적 선택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타적 인간인가?
지금까지 인간의 행위의 목적과 결과를 중심으로 검토했다면, 이제는 ‘나’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지금껏 살아온 모든 행위의 목적과 그 선택을 모두 비교하여 정리한다면 내가 이기적인지 이타적인지를 구분하는 것에 가장 적합하겠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옵션이다. 먼저 사회생물학과 호혜주의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면 나는 이미 기혼자이기에 나의 생식을 도와줄 가족과 경제적 활동을 도와줄 사회적 관계자를 제외한다면 사실 굳이 이타적인 행위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나 현대 윤리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면식이 없는 사람의 질문에도 나는 친절하게 답변을 줄 수 있는 이타적 마음이 있다. 하지만 만약 그들에게 내 재산의 일부를 양보하거나 경제적 기회를 양보할 마음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히 대답할 자신이 없다. 나 역시 경제교육을 끊임없이 받았고 누구보다도 경제적인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 역시 자기 본위의 생각을 기반으로 이타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적 이기성을 가지고 이타적인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 정도의 이타적인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사회에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오늘도 한번 더 노력을 해보려고 한다. 나는 이기적이만, 적어도 이타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기를. 이것이 바로 현대적 관점의 Win-Win이니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이타적인 결과를 만들고 싶다
[1]김보일, 월간<논>,『인간의 도덕성은 어떻게 이기심을 물리치나』, 2008
[2]우혁준,「인간의 이타적 행동에 관한 연구-이타적 행동의 사회생물학적, 성서 윤리적 이해 」, 2003
[3]우혁준, 위와 동일, 2003
[4]김보연 외 1인,「경제 교육은 인간을 더 이기적으로 만드는가?」,한국 사회과교육연구학회,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