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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그냥 May 06. 2019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지연사유'와 '캣치업' 사이에서

고등학교 때 체육시간에 배운 내용 중 유일하게 기억나는 내용이 있다.

달리기를 하면 다리가 당기고 아픈 것은 젓산이 쌓이기 시작하는 것이고, 역치가 넘으면 이는 산화되기 시작하며 글리코겐과 아미노산으로 전환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달리기를 할 때, 다리가 천근만근 거려 찡그림을 참지 못하다가 30분 이상 달리면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면서 경쾌한 느낌이 드는 순간 최고조에 이르는 황홀경이 있다. 바로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나 '러닝 하이(running high)' 또는 '운동 하이(exercise high)'라고도 한다. 

과학적으로는 이 때 엔돌핀이 분비되며 중독적으로 운동을 지속할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체육이라고는 거의 못하는 내가 이런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하지만 근육이라고는 뇌근육과 손가락만 움직이면서도 이 러너스 하이를 느끼는 경우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6개월째다. 작년 11월 프로젝트에 투입되서 정책정리와 서비스의 비즈니스 구분을 열심히 정리해왔다. 똑똑한 후배님들과 파트너가 되어서 꽤 넓은 범위의 업무를 진행하고 있음에도 힘들 것 없이 자연히 잘 정리되어 왔다.  이렇게 큰 구축 프로젝트는 경험이 없는 친구들이지만 금방금방 잘 따라와주는 것이 학부모가 된 것처럼 기쁘다. 이렇게 똑똑한 후배들이 잔뜩 있다는 것을 마음껏 자랑하고 싶을 정도다.

때로는 이슈와 업무를 말로만 정리해주는 것이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 많은 양을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그랬다.


 그런데 이제 어느 정도 큰 정책이 다 정리될 쯤에 기획조직이 충원이 되면서, 기존에 함께 진행하던 업무들을 후배들에게 메인으로 공유해주고, 업무 이슈 관리만 해주게 되었다. 나의 일이 줄었냐고 한다면. 그렇지도 다. 기존 모듈의 큰 정책 진행은 계속 신경쓰면서,  담당자 없어진 다른 모듈 업무를 받아서하게 되었다.



 4월 10일 수요일에 새로운 모듈에 대한 담당자 지정이 되었고. 그 다음 1주는 기존에 잡혀있던 큰 방향의 정책에 대한 전임자들의 설명이 있었다.

이래저래 담당자가 떠있던 상태였던 모듈이었던 터라 깊게 디벨롭 하지 못한 상태의 아이디어들이 가득했고, 개발 설계를 하려면 정말 많은 부분에 대해 정의가 필요해보였다.


 의사결정이 필요했다.

부족하지만 기존 문서를 약간만 수정해서 넘기고 일정을 맞췃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부족한 부분을 고민해서 6개월간 진행한 정책을 재판단하고 프로세스에 맞게 요구사항을 재구성할 것인가의 기로였다.


 전자라면, 나의 일정은 문제가 없지만 프로젝트 진행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할 것이고.

후자를 선택한다면, 지금 일정을 준수해가면서 남들이 6개월간 한 업무양까지 캣치업해서 진행해야하는 어려운 문제였다.

 


 새로 온 어린 후배에게도 가혹한 일이었지만, 나는 다시  달리기로 결정했다. 결국 나는 프로젝트의 지연사유가 되었다. 모두가 요구사항 전달이 끝날 때에도 요구사항을 정리하고 있었다.

 캣치업을 하기위한 지연이었다.  12시 퇴근하고 과 밤, 주말, 근로자의날도 없이 일하는 업무 라이프가 시작됐다. 이렇게 2주반이 지났다.

  자세히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뭔가 정리된 느낌이 들고 앞으로 무엇을 더보고 더 챙겨나가야할지 리스트업할 수 있게 됐다.


  내 어깨는 뭉치고 눈은 졸리고 얼굴은 천근만근. 몸무게도 늘고 뱃살도 나오고. 한 얼굴에 머리는 어지럽기까지 한 상태. 그럼에도 도리어 살아있는 기분.


 두뇌가 뻐근하게 고민하며 토해내는 정책에서 느껴지는 이 기분은 마치 '러너스 하이'. 숨막히는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카타르시스'가 포함된 형태의 감정.

 

 프로젝트는 분명 스트레스 덩어리다.  

 하지만 이 중독적인 러너스 하이는 아마도 계속 프로젝트를 달리게 해주겠지.  기획자에게 살아있는 이 기분은 아드레날린 중독과도 같다.

 그리고 이 살아있는 느낌을 다음 프로젝트에서 또 찾고 싶어하는 것이 일중독인지 기획자들의 습성인지 모르겠다.


 잘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좀 살아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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