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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그냥 May 20. 2019

아빠의 유산

전파사집 딸은 여전히 오류와 싸워요



아빠는 전파사 엔지니어

 

돌아가신 우리 아빠는 젊은 시절 전파사를 운영하셨다. 말하자면 전자기기 수리 엔지니어라고 해야할까. 가게에 딸린 단칸방에서 자란 우리 자매는 일상이 전자기기였고 공구가 장난감이었다.


 전선 피복을 벗기는 '와이어스트리퍼'에 여러가지 굵기의 전선피복을 떡국떡 썰듯 썰어대며 놀았고,


양쪽 극이 되는 쇠막대를 대보며 사이에 전기가 흐르나 검사하는 테스터기는 드럼스틱치듯 쳐가며 박자에 맞춰 바늘움직이며 가지고 놀았다. 귤껍질이나 수박껍질은 무조건 전기가 흐르는 지부터 확인했다.

아날로그 테스터기의 모양

 단칸방의 구석에 있는 아빠는 작업대는 너무 가까이가서 만지면 혼이 났다. 회로도의 납찌꺼기가 어디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업대에는 테스트용으로 전선을 흘러보기위한 작은 수동식 발전기도 있었는데 전화기를 고치고나면 아빠가 발전기 손잡이를 빠르게 돌려보라고 했었다. 아빠작업대에 갈 수 있는 시간이 몇없었기에 신나서 손잡이를 돌려대면 이제 막 고쳐져서 분해되어 있는 전화기가 '따르르릉'하며 큰 소리를 내었다.



 우리 집의 모든 가전은 부서지고 낡은 누군가가 쓰다가 버린 것을 고쳐서 쓰고 있었고, 쓰고 있다가도 누가 찾으면 팔려나가기 일쑤였다. 냉장고를 팔아버려 냉장고 없이 데일리로 밥을 해먹으며 몇달을 보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가끔 최신 카세트나 비디오에 갇혀서 오는 테이프가 있으면 최신 문물을 듣고 보게 되기도 했다. 우리 언니의 어린 시절을 가득 채운 H.O.T와의 첫만남도 그런 식이었으니까.



아빠의 유산이 된 엔지니어적 사고방식


 아빠는 자주 밤을 새며 기기를 고치는 엔지니어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딸에게 해준 이야기들은 IT판에서 사는 나에게 고스란히 유산이 된 것 같다.

 아빠는 기성품 판매보다 고장난 것을 고치는 일을 주로 했다. 거짓말도 못하고 수완도 없는 편이라 저항하나 퓨즈하나 갈아주면 딱 그 돈만큼만 받아서 돈도 크게 벌지 못했다.

 하지만 딸에게 다정하게 지금 하는 일을 설명해주고는 했다.   텔레비전과 전화기의 전선과 퓨즈, 저항 등이 어지럽게 연결된 모습을 보여주며 어떻게 오류를 찾아내는지 자주 설명해줬다. 납땜가득한 회로판과 손때묻은 회로도를 들여다보며 전기가 끊어진 저항을 찾아내고 수정 후에 잘 고쳐졌는지 테스트를 하는 모든 과정을 설명해줬다.

 아빠는 본인도 모르게 '엔지니어링적 사고방식'을 가르쳐주셨다.


가설 세우기 - 실험해보기 - 다시 가설세우기 - 다시 실험해보기


 사실 이런 무한반복적인 패턴은 엔지니어링적 사고 방식에 기인한다. 단번에 오류의 원인과 결과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번의 가설과 실험을 통해 해결해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그리고 아빠는 '문제해결의 즐거움'도 가르쳐주셨다. 고장나서 더이상 울리지 않던 전화기가 다시 따르릉하며 울리는 순간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기에 문제 해결의 과정은 마치 게임처럼 희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IT도 다르지 않아


 아빠를 닮았다면 난 기계 개발자가 되었어야 하는것 아니냐고? 아마도 그래야 됐겠지. 못된 것은 순전히 대한민국의 교육방식 탓이었을 것 같다. 문이과를 나누는 묘한 기준에 나는 이과를 갈 재목이 되질 못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건데 이런 엔지니어링적 사고방식은 IT에서도 동일하다. 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건과 가설을 세우고 이를 실험한다. 화면에서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나 기계나 오류가 발생하고 다뤄지는 과정은 묘하게 비슷하다.

 오히려 어린 시절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를 매번 눈으로 보게 해주고 결과(output)가 있으려면 무조건 이유가 되는 원인(Input)이 있을 것이라는 로직적인 사고를 키워주었기에 지금처럼 쉽게 적응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래서 전파사집 딸은 오늘도 오류와 로직안에서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반복한다. 손으로 코딩하지 않고 머리속에서 사고 실험을 가장 많이 하는 기획 직무일 뿐이지만 엔지니어링적 사고가 있기에 가능했다.

 10년간의 긴 병 끝에 미안해하시며 돌아가신지도 벌써 5년. 돈보다 값진 아빠의 유산을 지켜나가는 것도 작은 효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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