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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그냥 Aug 13. 2019

이토록 단호해야 했을까

일하는 기획자와 그 뒤의 공허함


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의 C(Choice)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정말 유명한 명언이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것은 기획자에게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기획자의 존재이유일 수도 있겠다.


 머리 속에서 지금의 조건과 미래의 가능성을 고려해서 최적의 케이스를 산출해내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 결정으로 얻을 많은 의문과 질의에 대한 해결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덤이다.

 그래서 기획자의 결정은 논리적이고 그 선택에는 신념이 있어야한다. 많은 이의 시간과 고민, 그리고 고통이 내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유연하면서도 강인한 기획자가 되는 것


 하지만 기획자에게는 이중적인 잣대가 동시에 적용된다. 유연한 사고관으로 모두의 의견을 조합할 수 있는 능력과 동시에 흔들리지 않은 사고관으로 하나의 방향성을 올곧게 지켜나가야 하는 강인함이 동시에 필요하다.


 특히 내가 지금같은 전쟁통같은 프로젝트 상황에서는 빠르고 명확하게 정리해서 짜릿한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명쾌한 해결이 중요하다.

 

 쉽게 말하면 받아줄 건 받아주되,

 포기하지 않아야할 부분에서는 단호박이 되어야한다.



하지만 조금도 쉽지가 않다

 

 "네, 이렇게 정리해주시면 좋겠어요. 이해되셨죠??"

 웃는 얼굴로 명확하고 단호하게 기준과 정책을 줄줄 말하는 내 말끝에 내가 다 얼어버릴 것 같다.

 얼마전까지 내 머리속의 연결고리를 나의 이성이 따라가지 못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회의시간에 몰입하여 떠드는 내 상태는 이제 그 시기도 지나갔다. 인간 이미준은 지워지고 머리 속이 온통 시스템과 정책만 담긴 샤머니즘의 망아(ecstasy)에 가까워졌다.


망아(ecstasy)

일상적인 의식수준이 저하되면서 빠져드는 망아(忘我)상태 또는 황홀상태.


 

 회의는 점점 더 단호하고 기준은 더 명확해지는 느낌.

 그런데 이렇게 신념이 커질수록 내 안의 기획자가 아닌 나는 다른 불안이 생긴다.


 "서비스기획은 직업일 뿐인데 이렇게 단호할 일인가?"


 일을 하려는 나는 매일 같이 칼을 들고 뻗어나가는 가지를 정리하고 있다.

 일이 아니라면 다같이 좋은게 좋다며 즐겁게 웃으면서 돌아갈 길인데

 일이기 때문에 그 길로 돌면 안되는 이유를 계속 이야기한다

 

 기준을 포기하면 쉬워지는데

 기획자는 UX도 서비스도 기준을 포기하면 안된다는 직업의식이 내 발목을 잡는다.


 내 몸이 힘들어서 처리할 수 있는 부분은

 그냥 내가 해버리면 된다고 생각해왔는데, 내가 해버릴 수 없는 상황에서 지켜야하는 기준과 그 부담감 사이에서 일을 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일하는 나 자신과 그 뒤의 공허함.

 단호박같고 사이다같은 일하는 나와

 사실은 조금 엉성하고 허술해지고 싶은 인간적인 나사이의 싸움.


버겁다는 느낌도 잊혀진지 오래고 신념으로 일을 한다.

완전한 몰입감 뒤의 공허감은 아마 아직도 제대로 다 해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아닐까.


오로지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잠시 내려놓자.

일단 한발 한발 정리하지 않으면 몇발짝도 나갈 수 없으니까.


해낸다. 해치운다.

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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