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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그냥 Jan 18. 2020

위로의 말보단 그냥 믿어주세요

'너도 지칠거야'대신에 '너가 할만큼 해보자'라고 해주세요


자꾸 화가 난다. 자꾸 짜증이 난다.

막판 스퍼트. 예민한 감정이 자꾸 툭! 하고 가슴을 헤집고 뛰쳐 올라온다.

이제 얼마남지 않은 일정. 오픈의 부담감, 계속 나타나는 허점들.

매번 서비스기획 수업을 할 때 앞에서 요구사항을 미니멀하게 가져가야함을 강조하는 것은 프로젝트는 항상 크레센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누구 말처럼 걍 '이러면 좋겠어요'라고 생각한 과거의 나를 한대 치고 싶어지는 건 케이스가 나타날 때마다 뒷수습해야하는 것도 결국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프로젝트가 한창 절정에 치닫는 이 무렵. 나는 급격한 감정적 절벽에 와있다. 담당 기획의 무게감에 짓눌렸다.

이커머스에서 주문클레임이라는 모듈을 기획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특히 20년 된 온라인 단골들이 50년된 그룹사의 오프라인매장을 운운하며 서비스의 질을 판단하는 이 곳에서는 클레임이나 고객 서비스의 역할은 단순히 기능 그 이상의 부분을 차지한다.


너무 힘들어 보인다.
너무 예민해보여. 그러지마
이건 다 불가능한 일정 때문이야
지금 과도한 상황은 니 탓이 아니야
힘들어 하는 것이 안타까워
리더들이 인력을 더 배치해야 했어
지금은 괜찮아도 너도 곧 지칠거야

나에 대한 걱정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몇 주째 밤 11시가 넘어 택시를 타고 퇴근하고 매일 업무에 허덕이는 내 모습에 동료들이며 가족들이며 던지는 소리들은 분명 위로의 목소리이자 애정의 소리들이다.


하지만 지금 이런 소리는 무엇보다도 위험하다.

스스로 저 말을 인정하는 순간 투쟁의 의지는 줄어들테니까.

누군가를 탓하고 리더를 욕하고 불만의 소리를 내는 것은 어떤 조직에서도 마음의 위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위안이 '포기'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짜증날 땐 짜증을 내고 화가 날 때 화가 나더라도 자신의 목표를 쉽게 포기하면 습관이 된다.


어차피 이 상황은 변하지 않고, 나는 이 상황을 이겨내야한다. 지금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면 내가 해내야한다. 정말 내가 화가 나는 것은 이 문제들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나 자신이다.

난 한계가 왔다고 좌절할 틈도 없다. 왜냐면 이미 몇 주전에 내 한계는 이미 지나쳐버린지 한참이다. 곧 고갈 될 마지막 의지를 부여잡고 버텨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인위적인 의지가 아니라 '내 서비스'라는 자존심이 날 붙잡고 있다. 이대로 오픈시키지 못하면 쪽팔리고. 내가 저지른 요구사항을 어떻게든 정리해내서 마무리하고 싶은 것뿐이다.


누구나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대하지 않는다.

나의 방어기제는 전투다. 뒤돌아서 울어도 분해서 우는 거지 못하겠다고 울지 않는다.


걱정해 주는 것은 진심으로
 고마운데,
나에게 도움되는 이야기를 해주면 안될까?
우린 이 상황을 이겨내야 해.
내가 지금 누구 핑계를 대고 원인을 찾는다고
내 상황은 바뀌지 않아
난 방법을 찾을거야
하루 울고 하루 화내도 내일은 또 웃을거야
이건 일시적인 상황이고 나중에 이때를 기억할 때 나 자신에게 당당해지고 싶어



안간힘을 써보지 않은 사람은 성장하지 않는다.

닥쳐서 해보지 않은 사람의 이론에는 진정성이 없다.


내가 힘들고 지쳐보이면 내 스스로 지쳤다고 느끼지 않게 해주는 것이 훨씬 도움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랑이 불타오르듯 슬럼프가 찾아오는 순간은 내가 슬럼프에 빠졌다고 정의하는 그 순간부터다.


절속에 존버는 실패한다. 의지가 아닌 의도가 있어야 버티는 것이 아니라 이겨내는 방법이다.

결국 내가 해볼 수 있는 만큼 해봐야 안다. 설령 그게 남들보기에 실패한데도 내가 실패했다고 여기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은거다.


이 원칙은 내가 후배들에게  응원할 때도 똑같이 적용한다. 네가 무리하고 힘들어보이고 상황이 잘못됐다는 말의 위로는 독이 되기 쉽다. 어차피 난 잘 이겨낼 친구들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그런 믿음이 더 힘이 된다고 믿는다.




요즘 퇴근후에 이어폰을 끼고 피아노를 치거나

춤을 추면서 스트레칭을 한다.

몸을 움직이면 짓누르던 부담감이 줄어들고 어쩐지 다시 현장으로 나갈 힘을 되찾는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내 주변사람들처럼 혀를 차며 안타까워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중에 내 자신이 기억에 당당해질 수 있을만큼 이 위기도 이겨낼 것이다. 어차피 날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이 날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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