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못하는 필라테스도 있는데, 잘 하는게 있으면 다행이지.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지 어느새 6개월. 필라테스는 나에게 체력보다도 다른 위로가 되었다.
와, 세상에 이렇게 못하는게 있다니?
하지만 그냥 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게을러서 어차피 자율의지로는 안할 것 같아서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무려 1:1로 10회 결제를 했다. 비싼거 아니까 더 안빠지겠지 했다. 다른 것보다, 극기훈련 받는 동안 머리 속이 깨끗히 비워지는 게 너무 좋았다. 이것저것 해야할 일들과 스스로에 대한 성장과 불안감이 뒤죽박죽 섞여있는 생활 속에서 '도그냥님!'도 아니고 '기획자'도 아닌 그냥 저질 몸뚱이를 가진 회원님이 되는 것을 오히려 아주 심적으로 편안했다. 그리고 깨달은 느낌이 바로 저거였다.
진짜로 세상에 내가 이렇게 감도 못잡고 진짜 바보같이 못하는 게 또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직업과 다른 점은 당장 선수가 될 것도 아니니까 엄청나게 잘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 날 문득 유튜브에서 만난 '김미경 쌤'의 강의에서 '운동하러 갔다가 만난 엄청나게 잘 하는 사람은 그냥 먼저 시작한 사람일 뿐'이라는 말에 위안이 되었다.
그냥 세상 만사가 그렇다. 조금 더 길게 한 사람이 조금 더 감을 잡고 있는 거고, 조금 더 일찍 노력한 사람이 조금 더 잘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필라테스뿐 아니라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계속 연장했다. 그냥 1시간씩 주 2회의 시간은 생각을 안하기로 했다.
이렇게 못하는 것도 많은데, 그나마 내 일에서
내가 잘하는 부분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종종 일하다보면 나는 왜 이렇게 그지같이 못할까하며 더 잘하고 싶은데 맘처럼 안되고 시간은 흘러가서 짜증이 잔뜩 날 때가 있다. 특히나 주변을 돌아보면 엄청나게 잘하는 사람은 꼭 하나씩 있고 내 연차는 어디로 갔나 싶은 때도 있다. 그런데 그 비교하는 사람과 나는 어차피 다른 사람이라서 내가 더 잘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더 잘하는 부분은 그 사람을 일찍부터 신경을 썼다는 뜻이다.
필라테스를 간 지 6개월. 선생님이 빵터지면서 하는 말이 '미준님은 처음부터 모든 동작을 너무 정성스럽게 하려고 한다'며 칭찬아닌 칭찬을 받았다. 이제는 필라테스 열심히 하고 오면 다음날 아랫배 어딘가가 아프단 소리에 드디어 코어근육이라는 것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정말정말 엄청나게 못하지만 그냥 정성스럽게 들은대로 좋은 방향으로 하려고 애썼다. 오늘 늘었는지 나는 모르지만 그러다보면 느는게 실력이었다. 그걸 10년 넘게 일하다보니까 자주 잊는다. 항상 그냥 똑바로 정성스럽게 노력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실력은 느는 것이었다. '정성'과 '노력' 모두 쉽지는 않지만 '조급함'이 눈을 가리면 금방 포기하게 되는 부분들이긴 하다.
지독한 번아웃에 시달릴 때, 그나마 내가 잘 하고 있는 부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정말 진짜 하나도 못하는 말도 안되는 것을 시작해보자. 그리고 그냥 포기하지 말고 못하는 상태로 지속해보자. 잘한다는 것이 이런 과정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기억해보자. 익숙해진 것들도 이런 고통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기억해보자.
못해도 괜찮아. 그냥 조금씩 계속 하자.
한달전부터 태연의 '그대라는 시'의 피아노 악보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나는 피아노를 어릴 때 체르니 100도 다 치기 전에 학원을 관둔 탓에 플랫이 1개이상이면 겁을 먹고 못치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한계를 딱 '다장조'로 가지고 있어서 2년전에 피아노를 다시 산 뒤에도 맨날 어릴 때 치던 소나티네만 치며 유튜브의 피아노 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필라테스를 하다보니 이렇게까지 못하는 것도 있는데 피아노는 이 정도면 그래도 손가락은 움직이네 싶어서, #이 3개가 붙어있는 이 악보를 그냥 사서 연습하기 시작했다. 11월 중순부터 그냥 하루에 30분 정도 그냥 떠뜸떠뜸 연습했다. 2달 가량 그 악보 하나를 치고 있는데, 놀랍게도 이제 제법 반주 비스무리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진짜 오지게 못하는 연주가 연습을 하다보니 조금씩 조금씩 음악이 되고 있다.
'자기 효능감'이라는 단어가 자존감의 핵심이라고 하는데, 그 감각을 가장 해치는 것은 언제나 나였다. 최고로 인정받고 최고로 잘하고 싶은 마음은 도리어 나를 깔아뭉개고 힘들게 한다. 다 망한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들 때 오히려 생산성은 최악이었다.
일이 너무 익숙해지고 더 잘하고 싶은데 그 깊이가 어딘지 모르고 답답할 때, 삶에 상관없는 정말 못하는 것을 조금은 하자. 인생을 다 투자할 것은 아니고, 그냥 아주 조금 욕심없이 조금씩 나아지는 무언가를 찾자. 그럼 근거없는 자기 비하를 조금 줄일 수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