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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강민 Salawriter Dec 20. 2018

설거지의 원칙

요알못 아빠의 설거지 이야기

집에서 가족이 함께 하는 식사의 설거지는 내가 하는 편이다. 가사 중에서도 설거지를 맡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나는 요리를 못한다. 요리하는 과정이 유독 머리에 잘 안 들어와서 시도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데, 사실은 요리라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 일 년을 통틀어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은 주말에 만드는 볶음밥 한 두 번과 아내 생일 미역국 정도로 요리는 안 하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밥은 물론, 무엇이든 같이 누리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 함께 기여를 해야 한다. 다행히도 요리에 관심과 감각이 있는 아내가 밥을 짓고 요리를 하고, 나는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한다. 요리를 못해서 자연스레 정리된 가사의 분담이 남편으로서 설거지를 하게 된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아이가 태어난 뒤의 생활의 변화에 있었다.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건 아내가 더 신경을 썼고 떠먹여 주는 숟가락 수도 더 많았는데, 그만큼 아내는 밥을 늦게, 또 정신없이 먹었다. 아이가 밥을 다 먹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잠들기 전까지는 할 일이 태산이니 아이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마주 앉아 있을 여유가 없었다. 먼저 비운 내 밥그릇부터 씻기 시작했다. 그렇게 설거지는 아빠의 몫이 되었다.


아이가 둘이 되고 셋이 되면서 개수대로 차례차례 옮겨지는 밥그릇이 늘어난 만큼 설거지를 한 경력도 꽤 된다. 그렇게 십 년 넘게 설거지를 하다 보니 나름대로의 원칙이 만들어졌다.




1. 불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설거지가 먹고 난 뒤의 식기를 씻어 정리하는 일을 뜻하지만, 실제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씻기에 앞서 잘 불려 두는 것이다. 식기 중에서도 밥그릇과 숟가락은 찰기가 있는 밥풀에 닿으니 불리는 시간이 더 필요한데, 밥을 천천히 먹는 아이들 것은 밥풀이 단단히 자리 잡는 만큼 바로 불려 두지 않으면 씻을 수 있는 시간도 그만큼 미뤄진다. 아이들이 크면서 밥을 다 먹는 순서가 나를 앞서기도 한다. 누가 먼저 식사를 마치든 자기가 먹은 식기와 수저는 스스로 개수대로 옮긴다. 가끔 아이들에게 챙겨서 이야기해 준다. 물 뿌리는 것을 잊지 않도록.

막상 일을 하려고 할 때 등장하는 걸림돌은 반갑지 않다.


2. 작은 것, 잘 포개어지는 것부터 씻는다.

싱크대가 아주 커서 식기부터 조리 기구까지 한 층으로 세워서 건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평범한 싱크대에 평범하지 않은 식구 수 때문에 식기 건조통에 두 층 정도는 쌓아야 하는 우리 집에서는 쌓기를 감안해서 씻는 요령이 필요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씻다 보면 뒤로 갈수록 놓을 곳이 없어져서 먼저 쌓아둔 것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또 큰 식기가 아래에 위치하면 엎어져 있는 그 식기의 빈 공간은 쓸모가 없어진다. 작은 식기를 먼저 씻으면 건조통의 구석부터 채워가며 남은 공간을 생각하면서 쌓을 수 있다. 비슷한 크기와 종류의 식기들은 차곡차곡 쌓을 수 있으니 같이 씻어준다. 작은 것들을 다 씻고 나면 프라이팬, 냄비 같은 조리 기구를 씻어 뚜껑처럼 덮는다.

先見之明(선견지명) : 다음에 쌓을 그릇을 생각하며 씻는 안목


3. 엇갈리게 쌓고 띄워 세운다.

잘 씻는 것만큼이나 잘 말리는 것이 중요하다. 빨리 다 말라야 수납을 할 수 있다. 밥 먹고 돌아서면 밥 준비해야 하는 현실에 언제까지나 젖어 있는 식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잘 마르려면 물기가 잘 빠져야 된다. 식기의 기울기를 따라 물이 흐르고, 층층이 쌓아 놓은 식기를 타고 건조통 바닥까지 잘 내려가야 모든 식기가 잘 마른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식기가 완벽히 포개어지면 안 된다. 간격이 없이 만나는 면은 마르지 않으니 엇갈리게 쌓고, 같은 모양과 크기의 식기는 틈을 만들어 물길과 공기에 접하는 면을 만들어 준다.

일하느라 바쁜 사람에게도 마르느라 바쁜 식기에게도 숨통이 필요하다.


4. 헹구는 물의 낙수효과(?)를 이용한다.

식기는 몇 그룹으로 나누어서 헹군다. 예를 들어, 개수대에 쌓여 있는 식기의 반 정도를 세제로 씻어서 먼저 헹구고 나머지를 또 그렇게 한다. 헹구는 물을 활용할 수 있어서인데, 양념이 묻은 식기를 물이 떨어지는 곳에 놓아두면 웬만큼은 저절로 씻겨 나간다. 다른 것을 헹구는 동안 알아서 깨끗해져 있으니 수세미질을 덜어준다고나 할까.

일적이세(一滴二洗)  : 어차피 쓰는 물 한 방울로 다른 것도 씻는다. ※저자의 신조어입니다.


5. 기름 때는 뜨거운 물세례 후, 전용 수세미로

프라이팬처럼 기름기가 있는 조리 기구도 낙수효과를 이용해서 1차 자연 세척을 하는데, 이 때는 먼저 씻는 식기를 뜨거운 물로 헹구면서 프라이팬을 아래에 둔다. 앞 그룹의 식기를 다 헹구고 나면 줄어 있는 기름기를 전용 수세미로 씻는다. 이렇게 기름기가 있는 것은 마지막에 씻는데, 깜빡해서 다른 수세미를 쓰게 되어 플라스틱 용품 등에 기름막을 입히지 않기 위해서다. 다 헹구고 나면 설거지도 끝났으니 고무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확인을 한다. 고무장갑을 끼고 있으면 기름기가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지운 기름기도 다시 보자.




어떤 일이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과정과 결과가 달라진다.

집안일이든 집 밖 일이든.





작가, 작곡가로 활동하는 직장인 김강민의 이야기입니다.^^

https://brunch.co.kr/@windyroad2/173


김강민 작가의 또 다른 가사의 원칙은 아래 글에서 확인하세요. :)

https://brunch.co.kr/@windyroad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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