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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강민 Salawriter Jul 18. 2017

학생 아빠의 기억, 직장인 아빠의 생각

아빠의 신분과 가족의 생활 변화에 대한 기억

가족이 다섯 명이 되기까지 10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돌이켜 보면 변화도 참 많았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영향이 컸던 것은, 가정 환경의 가장 큰 변수였던 유학생에서 직장인으로 나의 신분 변화였다.




食(먹을 식)


첫째가 14개월이던 해에, 당시 세 명이던 우리 가족은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적어도 5년은 지나야 돌아올 수 있는 아빠의 유학 길을 함께 떠난 것이다. 다행히 학비와 함께 일정 생활비를 장학금으로 지원 받게 되어 유학을 떠날 엄두는 낼 수 있었지만, 가족이 생활하기에는 부족한 생활비였고, 불확실한 졸업 후의 상황도 생각해야 하니 추가적인 비용은 최소한으로 하며 아르바이트도 병행할 수 밖에 없었다.


유학생 신분으로 공부하면서 세 가족이 생활한다는 것은 정말 녹록지 않았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알뜰하게 할 수 밖에 없었고, 둘째가 태어난 후에도 달랑 사과 하나 배 하나를 가지고 네 명이 나누어 먹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생활은 소박했다. 한번은, 마지막 남은 단감 한 조각을 아내가 먹은 일로 언성을 높여 밤 늦도록 싸웠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엄마라는 사람이 그럴 수 있어? 모성애가 있기는 해?”
“나도 사람이야. 좀 먹고 살자.”

요즘 말로 참 웃픈 기억이다. 가족을 생활고의 수렁으로 빠트린 가장이 도리어 큰 소리를 치다니. 평생 반성하면서 살 일이다.


유학 시절, ‘특별한 날’의 과일상


졸업을 하자 마자 귀국을 했고, 겨우 3일을 쉬고 출근을 했다. 공부하느라 지친 자신, 그리고 함께 해준 가족들을 위해 한 달 정도, 아니 일주일이라도 휴식의 시간을 갖고 싶었으나, 하루라도 돈을 더 버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현실이었다. 슈퍼맨이 변신하듯, 캐주얼에서 정장으로 갈아 입은 나는 순식간에 직장인이 되어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 해 겨울 귤을 무려 한 ‘박스’나 샀다. 둘째의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였다.

“엄마, 나 귤 몇 개 먹어요?”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돼.”
“와! 엄마가 귤 두 개 먹어도 되고 다섯 개 먹어도 된대!”

아직도 과일이나 간식을 먹을 때 마다 종종 생각나는 일화다. 아이들이 풍족하지 못한 시기를 겪은 만큼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감사하고 미안한 일이다.




住(살 주)


집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일본 유학 첫 해에 살았던 곳은 방이 2개인 아파트 형태의 기숙사였다. 세 식구가 살기에 공간도 적당하고 집세도 거의 무료였으니 불안정한 첫 해의 보금자리로는 더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원칙상 한 해 밖에 살 수 없었고, 그 곳을 떠나고 난 뒤에는 통학에 1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에 있는 10평 남짓한 복층 단독 주택 형태의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다.


일본의 집이 원래 좁은 편이긴 하지만, 10평을 아래위로 나누다 보니 한 층이 겨우 5평 밖에 되지 않았다. 1층에는 주방 겸 거실과 욕실이 있고 나선형 계단으로 이어져 있는 2층은 방인, 좁을 뿐만 아니라 아기가 있는 가족이 살기에는 불편하고 위험한 구조의 집이었다. 하지만 집 값은 비교적 쌌으니 3년을 살았다. 복층집에 산다고 하니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남들에게만 로망일 뿐, 우리 집은 여름에는 2층이 찜질방이요, 겨울에는 1층이 얼음방이었으니 네 식구가 철철이 잠자리를 아래위로 옮겨가며 좁은 공간에서 살을 맞대고 지냈다.


복층형 기숙사 1층


복층형 기숙사 2층


졸업을 1년 반 정도 남긴 시점이 되어 고민이 생겼다. 이제 학위를 받기 위해 연구에 집중해야 하는데 매일 길에서 버리는 긴 시간이 너무 아까웠던 것이다. 그리고, 힘든 환경에서 생활한 아내와 아이들은 마음에 그림자가 생겨 더 이상 버티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기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는 11평 정도의 긴 사각형인 원룸이었다. 면적은 비슷하지만 집이 한 층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높은 서랍장과 커튼을 사용해서 방을 반으로 나누어 창 쪽은 침실, 복도 쪽은 거실로 썼다. 학교에서 15분 거리에 있어, 아이들 유치원 행사며 병원 진료며 필요할 때면 다녀갈 수가 있으니 아빠 역할을 하는 데 있어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좁은 복층집’에 살던 사람의 눈에 비친 ‘단층 원룸’이라는 신세계


침실과 거실의 경계가 된 수납장과 커튼


귀국하고 나서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집도 넓어졌고 공간 구성도 좋으니 살기가 참 편하다. 그런데 요즘도 가끔씩 이야기한다.

“그 때 그 원룸 참 좋았는데.”

객관적으로 공간 자체는 좋아졌지만, 11평 원룸에서 느꼈던 소박한 행복함, 안락함은 그 때만 누릴 수 있었던 공간감이 아닐까 한다.


풍요로움은 상대적인 것이다.




遊(놀 유)


귀국한 후 2년이 지나 막내가 태어났다. 형들에 비하면 처음부터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힘들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더 많았던 그 시절의 추억을 간직하고 함께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은 아쉽다는 것이 이기적인 아빠의 마음이다. 비싼 돈 들여 가는 테마파크도 좋지만, 한 여름이면 주말마다 땀 뻘뻘 흘려가며 곤충 채집통 한 가득 메뚜기를 잡았던 집 근처 풀밭이 더 기억에 남는 놀이터였던 것 같다.


일본의 집 근처 풀밭에서 메뚜기 잡는 첫째와 숨죽이고 있는 둘째


요즘도 날씨 좋은 날에는 특별할 것 없이 그냥 넓고 넓은 공원으로 뛰고 구르며 놀러 나가곤 한다. 어려웠지만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았고, 사소한 즐거움에도 크게 웃었던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표지 이미지 출처 :blog.atmtxpho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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