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로 생각을 옮기고 살을 붙여가는 메모 습관
한 가지 역할만 해도 몸과 마음이 바쁜데 우리는 몇 가지 역할을 하고 있을까? 직장인으로, 부모이자 남편으로, 또 누군가의 동료이자 친구로 1인 다역을 하며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다. 그뿐일까? 직장인이라는 하나의 역할 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역할이 있는지.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방콕족)로 살지 않는 이상 심신이 여유롭기는 힘든 게 현실이다.
이렇게 많은 역할을 다 하자니 머리가 복잡할 수밖에 없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고, 점점 심해지는 단기기억상실증 탓에 방금 무얼 생각했었는지를 생각해 내는 데도 한참이 걸린다. 바쁜 와중에 시간의 빈 공간은 그렇게 늘어만 가고 수많은 역할 중 한 가지만 잘 하기에도 머리가 따라 주질 않는다. 이런 어려움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조금씩 쌓아가며 변화를 추구하는 삶, "티끌 모으기"의 이번 이야기는 누구나 하고는 있지만 모두가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은 메모의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의 뇌는 하루 종일 참 많은 일을 한다. 이해하고, 기억하고, 생각해 내는 등 한 명의 인간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있다. 신비롭기 그지없는 뇌이지만 기억력, 사고력, 창의력을 발휘하는 데도 정도가 있으니, 뇌에게 수많은 일을 다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뇌의 능력에 한계가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반드시 우리가 제 역할을 하는데 도움이 되느냐는 것이다. 베스트셀러 작가 샘킨의 저서 "뇌과학자들(해나무, 2016년)"에는 기억력에 한계가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모스크바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솔로몬 셰레솁스키(Solomon Shereshevsky)는 무엇이든 한 번 듣거나 보면 외울 수 있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한 번 외운 것을 몇 년 동안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음에도 결국 어느 일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자와 같은 삶을 살았다. 머릿속에 너무 많은 기억이 들어차 있는 것이 장애가 된 것이다. 실제로 그의 기억은 첫돌 이전까지 뻗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뇌의 능력에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한계가 있는 뇌를 도울 도구를 찾아서 일을 분배시키는 것이 평범한 인간으로 제 역할을 하는 편한 방법일 것 같다. 그리고 그 도구 중 하나인 메모의 능력은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머릿속에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들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머릿속에서만 처리하려면 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하다. 메모는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생각과 이미지를 시각화하고 형상화하는 방법이고, 생각의 과정을 옮겨 놓는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가 USB 메모리에 문서, 이미지, 동영상 또는 실행 파일 등 갖가지 정보를 담아 놓듯이, 메모 역시 뇌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정보를 옮겨 놓는 USB 메모리와도 같은 것이다.
머릿속의 어떠한 정보라도 쉽게 옮겨 놓고, 꺼내볼 수 있고 그 안에서 정보를 더하고 뺄 수도 있는 것이 메모의 기능이다. 그리고 종이와 펜, 간단한 애플리케이션 등을 활용한 메모로 비용 부담 없이 무한한 정보 처리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종이에 하는 메모는 한정된 지면을 비롯해서 수정과 보존의 어려움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한계가 있다. 하지만 종이 메모가 가장 기본적이고 편리한 메모의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스마트폰이라는 작은 컴퓨터가 손안에 들어오고 난 뒤부터 메모는 무한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 언제든지 기록할 수 있고, 얼마든지 내용을 보태고 수정할 수 있다. 메모의 자유도가 엄청나게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종이건 스마트폰이건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메모의 도구보다는 방식이다.
화분에 씨앗을 뿌려서 싹과 뿌리가 나고, 줄기가 자라 잎이 열리고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생각을 키워 나가는 메모의 방식을 "Idea Pot(생각 화분)"이라고 이름을 붙여 봤다. 생각의 단편부터 시작해서 점점 살을 붙여 가며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머릿속에서 메모로 옮겨 놓고, 필요할 때나 가능할 때마다 실행하는 것이다. 뇌의 부담을 줄이고 쉽고 빠르게, 지속적으로 생각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자주 메모한다.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기록한다. 휘발되기 전에 기록하기 위함이다. 떠오른 생각은 키워드 수준으로 메모하게 되는데, 처음 기록한 키워드가 바로 생각의 씨앗이 된다. 수첩이나 애플리케이션과 같은 메모의 도구에는 제목으로 기록이 된다. 씨앗과 이어지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면 역시 키워드 수준으로 메모를 계속한다. 중요한 생각들은 뿌리가 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요소들은 줄기와 잎이 된다. 그렇게 생각은 수시로, 빨리 기록함으로써 효율적이고 소모적이지 않게 생각을 키워나간다. 씨앗을 심어 두고 생각이 날 때마다 물을 조금씩 주어서 식물을 키워나간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애써 고민해서 메모하지 않는다.
생각을 메모하다가 내용이 고갈되어도 메모를 펼쳐 놓고 고민하지 않는다. 대신 다음에 생각이 떠오르면 또 최소한의 시간을 들여 생각에 살을 붙인다. 즉 금방, 쉽게 메모해 두고 잊어버리는 것이 Idea Pot을 활용하는 방법이다. 식물 화분에 물을 주고 얼마나 자라나 지켜보고 있지 않듯, 생각을 메모에 옮겨 놓고 잊어버리고 있으면 어느 순간 조금 자라난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면 화분 속의 생각의 식물 위에 더 자란 만큼 줄기와 잎을 올려놓으면 되는 것이다. 쉽게 떠오르지 않는 생각을 기다리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억지로 생각을 만들어 내느라 뇌를 지치게 하지 않는 것이 Idea Pot 메모법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떠오르는 그대로 기록하고 실행 단계에서 내용을 다듬는다.
Idea Pot 메모 자체에는 생각의 내용을 다듬지 않고 날것 그대로 기록만 한다. 내용을 꾸미느라 다른 생각이 휘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중요한 내용은 Idea Pot에 차곡차곡 쌓여 있으니 내용을 다듬는 것은 생각을 실행할 때 하면 된다.
[Idea Pot 메모 방식]
■ 식물 화분 : 씨앗 심기 → 지켜보고 있지 않기 → 생각나는 대로 조금씩 물 주기 → 결실
■ 생각 화분 : 생각의 키워드 메모하기 → 펼쳐 놓고 고민하지 않기 → 떠오르는 대로 생각 메모하기 → 실행
Idea Pot 방식은 일의 내용, 일상적인 계획, 아이디어 개발 등은 물론이고, 생각을 정리하여 글을 쓰는데도 활용할 수 있다.
이 글이 발행된 티끌 모으기 매거진의 지난 글인 "출퇴근 길, 걷는 시간의 가치"는 평소에 Idea Pot 방식으로 메모해 둔 생각을 몇 시간 동안 정리한 글이다. 다른 메모와 비교할 때 내용이 아주 적은 편으로 핵심적인 키워드 몇 개를 기록했고, 이를 바탕으로 생각을 정리한 한 편의 글을 하루에 만 명 이상이 읽고 생각을 나누고 있다.
그리고 "외국어 입문에서 국비 유학까지의 십여년, 그 후"는 다음과 같이 여러 번에 걸친 메모를 통해 모은 소재를 정리해서 쓴 것이다.
단어 하나가 가지는 힘은 대단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이 담긴 단어 하나를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 휘발되는 경우와 비교할 때 큰 의미가 있다.
생각의 단편들이 쌓이고 쌓여 큰 생각의 묶음이 되고, 탄탄한 계획이 되고, 새 출발을 위한 방향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머릿속에서 떠올라 맴도는 생각의 단편들을 빨리, 자주 메모로 옮겨 여러 가지 생각을 동시에 쉽게 키워나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난 뒤에 메모장을 넘겨 보면 많은 것들이 쌓여가고 있고, 그중에 많은 것들은 이미 실현되어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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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이미지 출처 : Nes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