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셋과 함께 한 여수 여행
뜬금없지만, 여행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아빠와 회사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볼까 한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동일 인물을 지칭하지만 무언가 느낌이 다른 ‘아버지’와 비교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두 호칭의 사용 기준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같이 노는’ 친구에서 ‘같이 늙어 가는’ 친구로 바뀌는 변화의 정도를 호칭으로 바꾸면 아빠와 아버지의 차이이지 않을까 마음대로 생각해 본다. 아빠 같이 놀자. 아버지 한잔해요. 예를 들자면 이런 느낌이랄까? 아직 초등학생, 유치원생인 아들 셋에게 아빠는 같이 놀고 싶은 친구이고, 그만큼 함께 할 시간이 많이 필요한 존재인 것 같다.
그러면 회사는? 틈만 나면 아빠를 데려가서 놀아주지 못하게 하는 존재일 것이다. 주말에도 데려갈 때는 얼마나 얄미울까? 회사에서 아빠에게 월급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포기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 같긴 하다. 아무튼 아이들에게 회사는 아빠를 사이에 둔 연적(戀敵)과 같은 존재인 것 같다. 얄밉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자꾸만 궁금한 연적.
당시 직업이 컨설턴트였던 나는 프로젝트 단위로 일을 하고 있었다. 프로젝트에 따라서는 출장을 가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출장의 종류도 지방 출장, 해외 출장, 짧은 출장, 긴 출장으로 다양했다. 그 해 가을, 나는 또 출장을 떠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긴 지방 출장, 두 달 동안 여수로 출장을 떠나게 된 것이다. 평일에는 여수에서, 주말에는 서울 집에서 지냈는데, 예전 두 달 간의 미국 출장에 비하면 훨씬 나았지만, 그래도 평일에 떨어져 지낸다는 것은 가족들에게나 나에게나 걱정이 앞서는 일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좋은 점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여수에 잘 곳이 생긴 것이다. 장기 출장이다 보니 숙소를 원룸으로 구하게 된 것이다.
아빠의 출장지를 여행의 목적지로 둔갑시키는 기발한 아이디어. 어떻게 보면 평일의 아빠를 통째로 회사에 빌려준 것에 대한 보상을 스스로 찾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아이들 사이에선 여수 여행을 언제 가느냐가 아빠의 출장이 언제 시작되느냐보다 더 중요한 화두가 된 듯했다. 드디어 출장이 시작된 주. 금요일에 일을 마치고 비행기로 서울 도착. 집에 돌아오니 벌써 저녁이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 마음에 결정을 내렸다.
지금 가자. 여행이란 거, 미루다가 언제 갈지 몰라.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데 출발 예상 시간이 저녁 8시 반.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다. 짐이 5인분. 잠시 막막하다. 하지만 이미 마음먹었으니 거칠 것 없다.
할까 말까 고민하느니 하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
여수에 도착하니 새벽 한 시가 넘었다. 한 밤의 드라이브에 막내는 이미 차에서 숙박 중이고, 형들은 처음 와 본 여수, 말로만 듣던 아빠의 아담한 집에 신이 나 눈이 말똥말똥하다. 오늘은 여수에 온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기뻐하며, 내일의 여행을 위해 서둘러 잠을 청했다.
첫날 우리가 향한 곳은 돌산읍의 ‘향일암(向日岩)’이었다. ‘해를 향한 암자’라는 뜻의 향일암은 이름만큼이나 일출 광경이 장관이라고 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자는 애들 둘러업고 해돋이를 만끽하기는 어렵고, 애 셋과 함께 외출 한번 하려면 준비하는 데 3차 대전은 기본이니 해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향일암으로 오르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주차장까지 차로 이동한 후 걸어서 언덕을 올라가는데, 건어물 가게들이 늘어선 포장된 길이 끝나면 돌계단과 가벼운 등산로 느낌의 비포장 도로가 이어진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아이들이 지칠까 걱정도 되고 급할 것도 없으니 쉬엄쉬엄 올라갔다.
그렇게 걷다가 만나는 큰 바위틈으로 만들어진 석문을 통과하니 법당이 나타난다. 바로 향일암이다. 아들 셋, 대견하게 잘 걸어 올라왔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향일암에 오르는 길에는 7개의 바위 동굴과 바위틈이 있고, 모두 통과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는데, 애들 챙기며 오르다 보니 안타깝게도 몇 개를 통과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한 해 동안 집안에 좋은 일이 많았으니 다 통과한 셈 치기로 했다.
향일암 곳곳에는 돌거북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는데, 그 모양 자체도 신기하여 아이들이 좋아하지만, 막내는 그 위에 얹혀 있는 동전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소원 성취의 염원을 담아 돈을 얹지는 못할 망정 남의 염원을 훔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슬금슬금 다가가는 손을 말리느라 바빴다.
‘암자는 돌산도 끝자락 금오산의 기암괴석 절벽에 세워졌다. 산의 형상이 마치 거북이가 경전을 등에 지고 용궁으로 들어가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쇠 금(金), 큰바다거북 오(鰲)를 써서 금오산이라고 불린다. 향일암에 남해를 향해 엎드려 있는 돌거북 장식이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출처: 섬과 골목에서 느끼는 여수의 속살, 연합뉴스, 2015.5.14)
바위틈 곳곳에도 동전이 놓여 있는데, 엄마와 첫째도 동전을 얹으며 일확천금을 꿈꿔 본 것 같다. 만약 소원 성취의 확률이 향일암에 놓아둔 동전의 총액에 비례한다면, 향일암에 오를 때에는 동전을 두둑이 챙겨 와야 할 것 같다.
금오산의 절벽에 바다를 향하여 자리를 잡은 만큼 향일암 곳곳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전통 건축물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 낯설지만 편안한 풍경을 앞에 두고 잠시 머릿속을 비워 보았다. 아이들에게도 지금껏 보아 온 해변과는 다른 바다의 풍경이 기억에 남았기를 바랐다.
향일암에서 내려와 다시 육지로 돌아가기로 했다.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을 차로 달리다 보니 바닷가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이 어촌 마을을 구경해 본 적이 없고 바쁠 것도 없으니 잠시 들렀다 가기로 했다.
골목길을 지나 바닷가로 가니 작은 항구가 있고, 마을 주민들을 위한 야외 휴식 공간에 운동 기구와 그네가 있다. 차에서 내린 아이들은 예상치 못한 놀이터가 반가워 달려간다. 역시, 그림 같은 풍경보다는 재미나게 놀 것들이 아이들에게는 더 좋은 법이다.
그네를 타고 높이 오를수록 바다가 가까워진다.
이런 풍경을 눈에 담을 기회가 자주 있을까?
항구 근처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일을 하고 있지만 그 풍경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궁금한 막내가 다가가 말을 건네니 할머니는 그을린 얼굴에 웃음을 가득 채워 화답을 한다. 결혼해서 육지로 떠난 딸과 함께 명절에 찾아온 손자를 보셨다면 저런 얼굴이시겠지 상상을 해 보았다.
육지로 향하는 길에 또 한 곳이 눈에 띄어 차를 세웠다. 전남 해양수산과학관. 공부도 되겠다 싶어 한번 둘러보고 갈까 했다. 그런데 차를 내리니 둘째가 작은 일이 급한 모양이다. 과학관은 입장권이 있어야 들어가니 급한 김에 건물 바깥의 화장실을 찾아보았다. 아들을 키우면서 좋은 점 중 하나가, 급할 때는 풀밭, 나무 상관없이 가까운 자연이 화장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뭐든 찾아서 건물 뒤로 돌아가니 이게 웬일인가? 몽돌 해변이 펼쳐져 있다. 무슬목해수욕장이었다.
지식아 미안하다. 노는 게 먼저다.
몽돌 해변이 처음인 아이들은 바닷가에서의 새로운 재미를 느낀 것 같다. 돌과 돌 사이를 건너뛰어 보기도 하고, 어디에선가 긴 막대를 주워 둘이서 바닷물을 찔러보기도 하고. 언뜻 보기에는 과연 무엇이 재미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아무튼 이제 돌아가자는 말에 몇 번을 거절한다.
석양이 지는 바다를 향해 소리쳐 보는 둘째와 파도가 무서워 그림 보듯 바다를 감상 중인 막내
여행에 있어서 여정은 너무 구체적이지 않는 편이 좋은 것 같다. 조목조목 정해 놓으면, 어딘가로 향하는 길에 우연히 만날 풍경과 인연을 놓쳐버릴 것 같아서이다. 함께 하는 사람들 각자에게 가장 좋은 추억거리는 제각각 일 테니.
더욱이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의 목적이 어떤 곳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면, 길을 가다 멈춰 서고, 잠시 쉬다 다시 길을 떠나는 여유는 꼭 챙겨야 할 준비물인 것 같다.
좋은 여행을 마칠 때면 다음에 꼭 또 오자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두 달이라는 짧지 않은 출장이었지만, 일 때문에 머문 곳이다 보니 가족들이 두 번 오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그때가 아니었다면 한 번도 못 올 뻔 한 채로 출장도 끝이 났다.
다음에는 또 어떤 기회가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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