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를 거쳐가는 여정의 기록(1편) *대학-대학원-대기업-대기업
많은 이들이 퇴사와 창업을 꿈꾸는 이 시대에 공학 박사 학위 취득 후 대기업에서 첫 직장 생활 시작, 그리고 몇년 후 다른 대기업으로 이직을 했습니다. 트렌드를 거스르며 대학-대학원-대기업-대기업의 4"대"를 거쳐가고 있는 과정을 기록해 봅니다.
1996년, 건축공학과에 입학하고 한동안 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은 질문이 있었다.
"니들은 도대체 왜 여기 들어온 거야?"
그해에 건축공학과 커트라인이 의예과보다 높았기 때문이었는데, 부와 명예가 보장된 의사의 길을 두고 뭣하러 굳이 막일(속칭 노가다)의 길을 택했느냐는 이야기였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는, 당시 몇몇 선배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아무튼, 이렇게 건축 관련 학과의 인기가 높았던 이유 중에 재미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비슷한 시기에 많은 수험생들의 마음속에 건축학도의 꿈을 심어준 드라마가 한 편 있었는데, 바로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방영한 이병헌 주연의 "내일은 사랑"이었다.
극 중에서 이병헌이 연기한 신범수는 건축과 91학번으로, 사자성어와 한자에 해박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다방면으로 완벽한 해결사 역할을 했다. 나 역시 도면 통을 어깨에 멘 신범수를 동경했었다.
입시를 준비하던 시기의 어느 날 어머니께서 넌지시 물어보신 적이 있다.
"의대 갈 생각은 없어?"
조금 고민하는 척 정도는 해도 될 것을, 피 보는 직업은 싫다는 이유만으로 격한 손사래를 치며 어머니의 혹시나 하는 기대를 접어버렸던 것 같다. 아쉽게도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기 위한 소명 의식 같은 건 타고 나지 않은 것 같다. 커트라인이 바닥이었다 하더라도 의대는 관심 밖이었던 나는 건축학도가 되었고, 학부 4년, 대학원 5년에 군대, 휴학, 사업의 기간까지 포함해서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건축만 생각하고 살았다. 그리고 나에게 건축가로 살아가는 것은 바뀔 여지가 없는 미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학부 시절 몇 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과외를 했고 대형 레코드점에서 일하기도 했다. 수입이 꽤 괜찮았던 일이 있었는데, 대학교 동문 선배님이 가끔씩 주는 일거리였다. 공장의 화학 공정 설계도를 그리는 일이었는데, 선배님이 손으로 초안을 그려주면 내가 CAD*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 Computer Aided Design : 컴퓨터를 이용한 설계
학부 2학년 마치고 군대를 갔는데, 그때까지 학교에서 설계는 손으로 하는 것이었다. 입대까지 시간이 남길래 CAD 학원을 다녔고, 군대에서 그 경력이 빛을 발해 부대 안의 시설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부서에 배치가 되었다. 3개월 배움에 투자한 결과 군생활 30개월을 화이트칼라로 지낼 수 있었던, 내 인생에 아주 잘한 일 중 하나였다. 그것도 정신적으로 황폐해지기 쉬운 입대 직전이라는 시기였으니 두 배로 칭찬할 일이다. 기나긴 군생활이 끝났을 때 CAD는 제법 숙련되어 있었고 복학 후 선배님의 의뢰에 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학부 졸업 후에는 유학을 떠나려고 했었다. 졸업한 해의 봄, 일본 국비 유학 시험에 응시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취직도 유학도 어렵게 되었으니 아르바이트 경험을 살려 일을 해보기로 했다. 가깝게 지내던 후배와 함께 하기로 하고, 회사명을 CADaid로 정했다. 당시, 흔히 대일밴드라고 불리던 반창고계에 BAND-AID라는 제품이 등장했었고 괜찮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었다. 도면의 디지털화를 돕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aid라는 단어를 따라 썼다. 사업 초기에는 모든 것이 미숙했는데, 함께 했던 동생을 서운하게 하는 일이 있었고, 그즈음부터 혼자 일을 하게 되었다. 친구와 동업하는 거 아니라는 말의 주인공이 나였다니, 미안한 마음은 아직 가시지를 않는다. 규모가 큰 프로젝트의 의뢰인들이 세금 계산서를 요구해서 개인 사업자 등록을 했고, 그렇게 사장이 되었다.
2004년 당시로는 비교적 스마트한 방식으로 회사를 운영했는데, 컴퓨터, 프린터, 전화, 책상 한 세트가 기자재의 전부였고 집의 방 한 칸을 내어 사무실로 썼다. 일이 고정적이지 않으니 프리랜서들을 고용해서 인력 풀을 만들어 둔 다음 프로젝트의 규모와 성격에 따라 일을 배분하는 식으로 운영을 했다. 주로 이메일과 메신저로 업무를 진행했다. 가장 재미있었던 프로젝트는 코엑스와 킨텍스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회 준비 작업이었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발명품 스케치를 모형으로 만들기 위해 CAD 도면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다빈치가 워낙 머리가 좋다 보니 발명품마다 단순한 것이 없고 스케치로 알 수 있는 형태도 한계가 있어 그림을 해석해 가며 작업을 했다. 투잡을 하던 다섯 명이 참여를 했고 일주일 정도의 단기간 작업이라 잠을 줄여가며 일을 했다. 그때 참여했던 멤버 중에 인테리어 회사 직원의 상기된 목소리가 기억난다.
“사장님. 아르바이트비가 월급보다 많아요.”
다음 해 시험에 합격해서 일본으로 떠나기 전까지 1년 6개월 정도의 시간 동안 CADaid는 계속되었다. 고객층과 서비스 범위는 점차 넓어져서 건설, 토목, 부동산 개발 업체부터 발전 사업자, 프랜차이즈, 기계 제조 업체 등을 대상으로 도면 제작, 3D 이미지 제작 등의 서비스를 했다.
사람들이 꿈꾸는 창업.
내 인생에서는 대단한 도전이라고 할 것도 없는 정도로, 잠시 겪은 흥미로운 경험처럼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유학을 떠나기 직전에 폐업 신고를 하면서도 특별한 아쉬움 같은 건 없었다. 일에 대해 추구하는 모습 역시 개인 취향이란 것이 있는 건지. 아니. 어쩌면, 나에게는 유학이 훨씬 더 큰 도전이고 인생에 더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사업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사업의 경험이 기억과 이력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덕에, 일을 할 때의 사고 방식과 자세가 이전과 달랐고 조직에서의 리더가 되었을 때도 역할을 하기가 수월했다. 그리고 이력서의 그 한 줄은 취직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 2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