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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Aug 28. 2021

[어슬렁,남해]22. 전원 돌격 주방으로

'네트워크 파티'를 준비하는 우리들의 자세

저녁식사 자리에 남해 지역 청년 단체들을 초대하는 '네트워크 파티'가 열리는 날이다. 월남쌈과 수비드 스테이크, 보쌈과 브뤼치즈 구이 등 파티 음식을 준비하느라 주방이 북적였다. 우리가 남해에 도착한 첫날 가졌던 웰컴파티 이후, 살러* 전원이 주방에 투입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주방을 총지휘하는 카리스마 '수'의 지시에 따라 각자 업무를 분장받은 후, 전쟁 같은 깎기와 썰기 맹공격이 시작되었다. '금'은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양파를 썰고, '성'은 주방 귀퉁이에 지박령처럼 붙어 서서 파프리카를 썰었다. 나는 '찬'과 함께 성인 앉은키만 한 망태기 속의 감자를 벗기고 또 벗겼다. 어깨가 결려 잠시 고개를 들어보니, 우리들의 수석 조리사 '한'이 가스버너 앞에서 홀로 스테이크 고기를 굽고 보쌈을 삶으며 양손 육(肉) 탄전을 벌이고 있다. 


전쟁터처럼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에 아뿔싸, 홀 테이블에서 야채를 썰던 '예'와 '름' 두 명의 전우가 자상을 입었다. '름'은 상처가 꽤 깊은지 출혈이 많다. 긴급히 손가락을 소독하고 붕대를 감은 후 곧장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멀리서 한 손을 든 채 지혈하는 전우들을 두고 되돌아서니, 같은 작업대 소속 중 유일하게 몸을 보전한 '문'이 외롭게 칼질을 계속하고 있다. 서둘러 감자 깎기를 마친 후 나도 긴급 투입되었다. 살아남은 자는 떠난 이들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법이다. 


잘 준비하고 싶었다. 제대로 대접하고 싶었다. 흥겹길 바랐다. 살러 프로그램 기간 중 처음으로 초청된 손님들이고, 평소 우리가 호기심과 관심을 보였던 단체들이기에 기대가 컸다. 명칭도 네트워크 '파티'이다 보니, 제법 근사하게 음식도 차려내고 싶었다. 그래서 과감한 식비 지출을 단행하며 한껏 욕심내어 장도 봤다. 


허나 생각보다 벅찬 준비 과정에 슬슬 지치고, 연이은 부상자 속출로 사기가 떨어지면서 '대체 누굴 위한 파티인가'하는 회의론, '우리가 왜 배달음식을 시키지 않았을까'하는 후회론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하지만 어찌하랴. 약속 시간은 가까워지고, 지금 저 장대비를 뚫고 손님들은 오고 있는 것을... 결국 서로 찌푸린 마음은 다독이고 다친 손가락은 위로하며, 막바지 힘을 냈다. 


총 7개의 테이블이 모두 세팅되고, 드디어 손님들이 한 둘 입장했다. <남해청년센터>, <키토부>, <마파람사진관>, <팜프라>에서 단체 동료, 가족들과 함께 방문했다. <해변의 카카카>와 <플랜포히어> 분들도 초대했으나 아쉽게도 못 오셨다. 우선 자유롭게 착석하여 식사를 마친 후, 대화를 나누기 위해 테이블마다 손님 분들을 모셨다. 내가 앉은 테이블엔 <팜프라>의 유지황 대표님이 동석했다. <팜프라>는 도시에서 시골로 삶의 전환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필요한 기술/지식/정보 인프라를 만들어가는 단체로서, 마을 입주 체험 프로그램, 이동식 목조 주택 워크숍, 논농사 워크숍, 로컬 이벤트 기획 및 운영, 디자인 및 출판, 작업복 제작 판매 등 다양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팜프라> 대표님은 우리의 무차별 질문 공세에도 침착하고 재치 있게 모두 답변해 주셨다. "귀촌을 하고 싶어도 막상 무얼로 먹고살 수 있을까 생각하면 막막해진다"는 고민에는 "동네 주민분들 따라서 시금치 농사만 열심히 지어도 먹고는 산다"며 안심시켜 줬다. 물론 도시에서 벌던 소득 수준과 비교하면 당연히 적겠지만, 덜 쓰고 부지런히 살면 농사로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다는 말은 '언젠가 귀촌'을 꿈꾸는 예비 시골 살러의 자신감을 북돋웠다. 반면 넘치는 아이디어와 도전적인 실험 정신으로 우리들의 '슈퍼스타' 같았던 <팜프라> 역시 고민이 많았다. 지금은 수익과 지출 규모가 거의 비슷해 겨우 유지하는 정도이니 얼른 안정적인 수익모델이 개발되었으면, 그래서 관의 위탁사업이나 공모사업 외에도 다양한 사업들을 더 자유롭게 해보고 싶은 바람들. 먼저 이 길을 지난 이들도, 이미 저 멀리 앞서 걷는 듯한 이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의 고민을 안고 있구나. 


내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다음 사람은 피할 수 있길 바라는 염려,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용기와 영감이 되길 바라는 배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곳 남해에서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길 바라는 기대. 오늘 기꺼이 시간을 써서 찾아와 준 분들은 그런 마음이었을 테다. 그 고마운 마음을 거름 삼아, 슬며시 나도 그들에게 작은 애정과 응원을 싹 틔워 본다. 더 자유롭게 더 많이 도전할 수 있도록 부디 그들의 사업이 번창하기를. 


* 살러: 남해군 지원으로 <6주 살러, 남해> 프로그램에 참여한 참가자들을 지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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