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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Aug 30. 2021

[어슬렁,남해]23.장마가 긴 잠을 자던 그를 깨웠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운무/ 이과수 폭포로 변신한 동네 개천

장마로 며칠간 종일 비가 내렸다. 습도는 높고 빨래는 꿉꿉하고, 무엇보다 발이 묶여 꽃내 센터에 갇혀 있자니 너무나 답답했다. 잠시 갠 틈을 타 홀로 동네 산책을 나섰다. 센터 현관을 나서니 온 세상에 운무가 그득하다. 슈퍼 가는 길목의 논둑길도, 고개를 들면 항상 그 자리에 서 있는 산도 새하얀 안개 베일에 반쯤 덮여 있다. 갓 태어난 순결한 세상을 축성하는 듯, 정결한 마음으로 세례 받고 흰 미사보를 둘러쓴 듯, 신성하고 거룩하다.   


조금 더 걸으니 금천교 다리 위에 다다랐다. 늘 평온한 리듬으로 바다를 향해 흐르던 개울이 밤새 불어난 수량으로 우악스러운 굉음을 내며 휘달리고 있다. 심장이 터질 듯 내리치는 우렁차고 박력 있는 소리는 마치 남미의 이과수 폭포가 따로 없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포악하고, 누구든 쓸어버릴 듯 무자비한 대자연의 야성. 며칠간 대지를 세차게 두드린 장마가 긴 잠을 자던 그를 깨웠나 보다. 


평소 우리는 자연을 포용적이고 평화로운 존재로 여길 때가 많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상처 받고 지친 영혼을 어루만져 낫게 하며, 온 생명이 조화롭게 살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그런 존재. 하지만 실상 자연은 물속에 얌전히 잠겨 있는 하마 같을지도 모른다. 세상만사 심드렁한 얼굴로 하루 종일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덩치 큰 느림보 순둥이처럼 보이지만, 화나면 악어가죽도 물어뜯고 사자 머리도 씹어 박살 내버리는 그 누구도 당해낼 자 없는 맹수. 그래서 결코 함부로 얕보면 안 될 두려운 대상.


온화하고 인자한 자연도 좋지만, 가끔씩은 죽비처럼 정신 번쩍 들게 만드는 엄숙한 얼굴도, 감히 넘보지 못할 만큼 위엄 있는 모습도 좋다. 제법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아왔다 여기면서도 여전히 자연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게 되다니... 모처럼 겸손해지는 하루다.         


정결한 마음으로 세례 받고 미사보를 쓴 듯, 거룩한 아침 풍경 ©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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