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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Aug 31. 2021

[어슬렁,남해]24.내일이 오는게 섭섭해 잠들지 못해

'예'의 마지막 밤 송별회/비오는 날불꽃놀이

'예'가 꽃내에 머무르는 마지막 밤이다. 그룹 여행 때 다쳐 깁스한 발이 2주가 넘도록 도통 차도가 없었다. 뼈가 빨리 붙지 않으면 철심을 박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덜컥 겁이 났다. 당장 서울로 올라가 제대로 치료받길 바랐지만, 본인이 결정해야 할 부분이니 섣불리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에서 매번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힘들고, 거동이 불편해지니 외부 활동도 어려워지고, 남해에서 실행하려던 프로젝트도 멈추고, 무엇보다 자기가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미안함이 너무 컸던 것 같다. 여러 밤의 긴 고민 끝에 내린 결정, 예상치 못한 때 이른 헤어짐이 섭섭하지만 그래도 잘한 선택이다.  


'예'는 마치 살러* 내 관계 역동의 중간지대 같았다. 누구든 편안히 얘기하고, 누구든 자연스럽게 안심하는 모모 같은 존재. 누구든 그녀와 대화를 하고 나면 서로의 공통점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는, 공감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의 부재가 너무 아쉬워서 서프라이즈 송별 파티를 준비했다. 한 마디씩 영상 메시지를 녹화하고, 그간의 활동 촬영본을 모아 편집하고, 파티용 포스터를 만들고, 롤링페이퍼와 감사카드에 마음을 담고, 풍선으로 살러방을 꾸미고, 사천시의 비건 베이커리까지 가서 케이크도 사 왔다. 


각자 할 수 있는 일, 하고픈 일을 자율적으로 찾고 도맡아 척척 진행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새삼 일의 '자발성'이란 얼마나 큰 가치였던가 실감한다. 진심이 우러나와서 하는 일이란, 누군가를 위해 스스로 나선 일이란 얼마나 정성스러울 수 있는지... 은밀한 007 작전처럼 한 명 씩 몰래 찾아가 영상 메시지를 촬영하면서도, 개인적으로 구매해 온 파티 용품들을 슬쩍 내주면서도, 장맛비를 뚫고 편도 한 시간 거리를 운전해 케이크를 사 오면서도, 새벽까지 포스터 일러스트 작업을 하면서도, 더딘 컴퓨터 앞에서 밤을 꼴딱 새우며 영상 편집하면서도, 무거운 의자와 테이블을 이리저리 옮기며 공간배치 하면서도 누구 하나 힘든 내색 없이 최선을 다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감동이 되고 싶은 순간이 있다는 건, 인생에서 그런 순간을 만난다는 건 참 아름다운 일이다. 


파티가 끝나고도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다. 누군가 내어 놓은 폭죽을 들고 보슬비 내리는 2층 테라스를 나섰다. 처음엔 다 함께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팔을 풀었다. 그리곤 각자 그리고픈 모양대로 휘둘러보았다. 하트, 별, 나비, 무한대, 파도. 어쩌면 우리네 무의식은 생각보다 순하고 착할지도 모른다. 이럴 때 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은 대게 둥글고 부드럽고 예쁜 것들이니 말이다.


막대 끝의 불꽃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몇 번이고 다시 불을 붙여봐도 끝이 아쉬운 건 여전하다. 결국 다 함께 원추리방으로 이동해 대화를 이어갔다. 이불 위에 배를 깔고 엎드린 사람, 모로 누워서 팔을 겐 사람, 다른 이의 다리를 베고 누운 사람, 벽에 등을 기댄 사람, 요가하듯 바르게 앉은 사람, 각자의 성격과 취향이 자세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재밌다. 


아쉬움이 길수록 밤도 길다.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수다는 새벽 4시까지 그치지 않았다. 결국 올해 들어 가장 긴 밤이 되었다. 내일 해가 뜨는 것이 섭섭할지라도, 이것이 결코 우리의 끝은 아닐지니. 곧 다시, 꼭 만날 거니까.  


이 밤을 놓아주기 아쉬워 빗방울을 맞으며 불꽃놀이를 했다. 지금 이 마음들을 간직하고파 ©성


* 살러(Saler): 남해군 지원으로 <6주 살러, 남해> 프로그램에 참여한 참가자들을 지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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