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서평
얼마 전 한 친구가 엉뚱한 상상을 들려줬다. 사람들이 흔히 '식물'하면 온화하고 평화로운 자연 상태로 여기기에 평소 그 존재감을 실감하지 못하지만, 만약 온 세상의 식물이 한꺼번에 파업하듯 숨쉬기를 잠깐 멈춘다면? 인류는 곧 멸망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나 무섭지 않으냐고.
그때부터였다. 식물에 대해 알고 싶어진 것은. 그저 야채나 과일, 풀과 꽃, 나무와 숲 정도로만 여겼던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어온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 책을 꼽아 들게 되었다.
고추는 왜 영어로 Hot Pepper 혹은 Chilli Pepper 일까? 후추와 고추는 생김새도 맛도 전혀 다른데... 중학교 때 영어 단어를 외우다 갸우뚱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선 이내 마음대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서양 사람들은 매운 것을 지지리 못 먹는다더니 두 개의 맛도 대충 비슷하다고 생각해 버렸나 봐.'
나의 이 얄팍한 호기심과 막돼먹은 결론은 오늘에서야 비로소 진실에 다다랐다. 바로 이나가키 히데히로가 쓴 책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덕분이다. 후추를 구해오겠다며 인도로 대항해를 떠났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잘못 도착했고, 아무리 찾아도 후추가 없는 그곳에서 낭패를 볼 뻔했으나 대신 신품종인 고추를 발견해 스페인으로 보내며 마치 후추의 한 품종인 양 이름을 ‘매운 후추’로 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아메리카 대륙은 구대륙의 욕망을 실현하는 장이 되어 플랜테이션과 노예노동으로 점철된 비극의 역사를 걷게 된다.
우연한 도착, 예상치 못한 발견, 위기를 모면하는 기지, 돈 벌 기회를 포착하는 영민함. 이 모든 행운의 조합이 지구 한 편에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힘이 되고, 또 다른 한편에선 가족과 고향을 떠나 노예가 되고 식민지로 전락해 오랜 세월 핍박받게 만드는 고통의 기원이 된다.
저자가 말했듯 세계사의 변곡점이 된 식물들은 모두 인류 욕망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굶주림을 벗어나 생존하고픈 욕망, 보다 영양 높고 건강하게 살고 싶은 욕망, 달고 풍미 좋고 향기로운 음식을 맛보고픈 욕망, 가볍고 따뜻한 옷으로 몸을 감싸고픈 욕망, 그리고 아름다움을 즐기고픈 혹은 과시하고픈 욕망, 그리고 그저 돈이 된다기에 가로채고 쟁여두고 싶은 욕망. 새 옷을 한 벌 사고 나면, 맞춰서 코디할 옷을 또 사고 싶고, 어울릴만한 신발도 사고 싶고, 결국 가방도 하나 사고 싶어지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은 늘 새로운 욕망을 다시 낳게 마련인가 보다.
여기까지만 보면 격동의 세계사 속에서 마치 식물이 억울한 악역을 맡게 된 것 같다. 죄 없는 식물이 욕망에 사로잡힌 인류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용당한 것만 같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그들은 우리의 고정관념보다 훨씬 지혜롭고, 주체적이며, 공격적이다. 더 많은 "햇빛을 사냥"하기 위해서, 열매 맺을 때까지 안전히 보호받기 위해서, 최대한 널리 씨를 퍼뜨려 대지를 장악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끝내 환경에 적합한 형태로 진화한다. 어쩌면 세상은 만물의 끊임없는 작용과 반작용 과정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 난 후 만약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이 생겼다면, 그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독서였으리라. 다소 백과사전식 구성이긴 하지만 식물 보급과 교역의 역사뿐 아니라, 인류 욕망에 대한 성찰, 인간 생리와 본성에 대한 탐구, 문화 현상에 대한 이해, 식문화 차이에 대한 해석, 이주와 이민의 역사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새로운 흥미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호기심 충만한 그대에게 추천하고픈 그런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