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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렇구나 Jul 25. 2020

다 쓴 글을 날리고 김훈에게 위로를 구하다

'글쓰기는 강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


소설가 김훈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김훈을 조금 안다고 할 테다. 김훈은 내 사랑 따위 필요 없겠지만 나는 김훈을 꽤 사랑한다고 할 테다. 독특한 아우라를 풍기는 김훈의 문체, 단어 하나 토씨 하나를 대하는 김훈의 태도에 반했기 때문이다.


얻다 대고 감히 김훈을 써먹냐 할까 봐 무안하다. 주제를 모르고 나대는 것 같아 키보드에 손을 얹은 채 숨 죽여본다. … 슬그머니 이어서 쓴다. 쓰고 싶으니까, 써야겠어서 쓴다. 편지지를 수십 장 버려가며 짝사랑하는 오빠에게  밤새워 첫 편지를 쓰는 여생처럼.


나에겐 퍽 드문 일인데, 자판을 두드리는 속도가 빨라질 때가 있다. 그럴 땐 주위를 둘러본다. 김훈이 내 손 끝을 주시하고 있을 것 같아서이다. 무슨 글을 그리 생각 없이 휘갈기냐고 할 것 같아서이다. 손가락을 자판 위에 올려놓고 커서만 노려보고 있을 때도 김훈이 신경쓰이긴 마찬가지다. 대충 휘리릭 쓸 때도, 글이 안 풀려 한숨이 나올 때도 김훈은 내 주위를 맴돈다.


문장까지, 단어까지, 갈 것도 없다. 토씨 하나에 목숨 거는 김훈의 일화를 나는 염두에 둔다.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이 그렇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와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를 놓고 담배 세 갑이나 태우며 고민했다는 김훈. 지독한 양반이다.


문장과 문장이 손에 손 잡듯 끌어당기고 밀어주고 해야 좋은 글이라고 배웠는데 내 글은 찬바람이 들게 구멍이 숭숭이다. 나는 요령을 부리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그리고'와 '그러나'로 슬쩍 메워주고 싶고, '하지만'이나 '따라서' 같은 애들을 몰래 갖다 붙여 놓고 싶다. 어설픈 땜질을 한 뒤 뻔뻔하게 시치미를 떼고 싶은 거다.


그럴 때 어김없이 떠오르는 사람도  김훈이다. 400페이지나 되는 소설 <남한산성>에서 '그러나'가 딱 한 번 발견되었다고,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의 저자 김정선 님이 김훈 예찬을 펼쳤으니. 딴 사람도 아니고 20년 넘게 교정·교열을 봐온 김정선 님이시다. 한 페이지에 '그러나'가 하나만 있어도 상을 줄 판에.

… 졌다.


다 늙어가지고선…, 어제 울 일이 좀 있었다. 며칠 전에 이미 열 시간은 넘도록 공 들여 써 놓았던 글을 고치다 날려버렸다. 퇴고를 하느라고 했는데도 손볼 것 투성이라 눈알이 빠지게 다듬어야 했다. 브런치에 올릴 두 번째 글이었다.


화장실 가고 싶은 것도, 배 고픈 것도 참고 수정을 했는데 '제출'이 되지 않았다. 새로운 플랫폼이라 익숙지 않고 서먹했다. '이용할 수 없는 이모티콘이 있어 제출이 안 됩니다' 라는 문구가 떴던 것도 같다. 우측 상단에 보이는 '∨'가 눌러지기만 하면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가고 아무 데서나 큰 대자로 퍼질러 누울 수도 있겠는데, 운명은 내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대체 뭘 건드렸는지 눈 앞에서 한 순간 글이 몽땅 사라져버렸다.  


다 쓴 글을 허망하게 날리고 울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모니터를 뜯어내서라도 잃어버린 문장과 문단을 수습하고 건져내고 싶은 그 심정을, 그 막막함을, 그 암담함을.


장대비는 또 뭐 하자고 그리 내리 꽂히던지. 유리창을 타고 내리는 빗물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나는 '대책 없음'을 시인하기로 했다. 찔끔, 눈물이 나왔다.


'글이 길면 길다고, 짧으면 짧다고, 쉬우면 쉽다고, 어려우면 어렵다고… 어떻게 쓰든 비판을 면하지 못하는 게 글쓰기라는 것이지만 고치면 고칠수록 나아지는 건 사실'이라고 말한 하루키가 풀쑥, 떠올랐다.


나보고 다시 고치라고? 숭숭 뚫린 구멍 메우려고 문단 사이사이 새 문단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 넣었는데. 그렇게 두 시간 가까이 고친 글을 첨부터 다시 다듬으라고? 하루키가 틀렸단 얘기가 아니다. 마음을 먹기만 하면 미처 생각지 못했던 단어와 문장이 떠올라 더 잘 써질지도 몰랐다. 그럴 기운이 한 알갱이라도 남아 있다면.




책장에서 김훈의 <바다의 기별>을 찾아냈다.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과 마주했을 때 묵묵히 받아들이는 법을 깨닫게 해 준 김훈의 문장을 읽어야 했다. 세상 사람 다 이겨도 자식에져야겠구나 싶을 때도, '사랑'이란 낱말이 있는 자리에 '자식'을 대입해서 읽곤 했던, 그러면 신기하게 맘이 편안해지던 김훈의 문장을 찾아 읽어야 했다.


페이지를 펼친 다음 나는 '사랑'이 적힌 자리에 '글쓰기'를 대입해서 읽어봤다. '글쓰기,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의 이름'이라고. 이럴 수가. '자식,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의 이름'이라 읊조렸을 때 못잖게 그럴 수 없이 적절했다.


그의 글을 베껴 본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은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


김훈의 산문집 <바다의 기별> 중 '바다의 기별' 첫 문단, '사랑' 자리마다 '자식'을 대입해 읽으며 막막함을 견딘 적이 있다


 '사랑'이라는 낱말이 놓인 자리에 '글쓰기'를 넣어 다시 조용히 읽어본다.


-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글쓰기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글쓰기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은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글쓰기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글쓰기라고 부른다. …… 글쓰기는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


진정되면서 눈물이 멎었다.'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자식'이라고 부른다'는 문구의 유효 기간은 끝났다. '글쓰기'를 집어넣고 나니 한결 그럴싸해서였다.


잘 벼린 칼날 같은 김훈의 글.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라는 문장을 어떻게 버무려낼 수 있단 말인지. 외경의 마음을 김훈에게 한참 보낸 뒤, 나는 노 작가의 수고를 가볍게 가로챈다. '사랑' 그 자리에, '글쓰기'를 밀어 넣고 '글쓰기는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라 읽고 싶어서. 대책없이 글을 날려버린 나를 위로할 방법은 그것뿐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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