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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 Nov 27. 2018

나는 왜 사직서를 제출했나

와인 마시러 퇴사하고 그렇게 떠나도 괜찮아요?

와인 산지로 떠나는 여행을 꿈꾸지만 ‘현실’이라는 닻에 매여 주저하는 이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퇴사를 결심했다.  


2년 동안 고민해서 제출한 사직서였다. 누군가는 내게 왜 그 좋은 직장을 관두는지 묻기도 했지만, 무모한 결정은 아니었다. 평생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모범생으로 살다 멈춰선 그 순간 고민이 시작되었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해본 적이 있었나. 사실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데…” 


예전부터 '와인'은 좋아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다. 경기가 불황일수록 알콜 소비량이 늘어난다고 한다. 술은 사람들이 불만족스러운 과거와 불안한 미래 대신 오롯이 그 순간에 빠져들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종류의 술을 마셔보았지만, 와인은 내게 조금 다른 무게로 기억 한 구석을 차지 하고 있다.  




2013년 겨울, 독일에 일자리를 구해서 한국에 있던 남자친구와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거미줄처럼 약해진 인연의 끈을 이어준 것이 와인이었다. 우리는 종종 각자의 부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요리를 만들었고, 이를 안주 삼아 영상통화를 하며 화면 속 서로의 얼굴에 건배했다. “짠”. 그는 한국에서 소주를 나는 독일에서 와인을 들이켰고, 때로는 취해서 통화 중에 잠이 들었다. 내게 와인은 소통의 매체이자 외로움을 버티게 도와준 연인이다. 

독일의 방, 한 벽면을 가득 채웠던 와인들


물론 옛 남자친구의 소식은 모르지만, 와인은 여전히 내 곁에 있다. 처음 접했을 땐 소주처럼 마셔버렸지만 - 자주 보면 정든다고 했던가 – 시간이 지날수록 와인을 향한 애정은 커져만 갔다. 동시에 한편으론 와인이 나의 정체성을 대변해 줄 수 없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내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가슴 뛰게 하는 것은 근무하던 회사가 아닌 결국, 와인이었다. 사직서에 서명하고, 의례적인 송별 회식에서 술 몇 잔을 기울인 후 매일 아침 6시에 울리던 알람을 해제했다. 그렇게 나는 담담히 회사와 이별했다.  

비행기에서 맞이하는 일출


뜻이 있다면 길이 열리겠지. 유별나게 길눈이 어둡고, 여행 계획을 짜는 데 젬병인 나는 편도로 비행기 표를 끊는 것으로 모든 여행 준비를 마쳤다. 한국행 비행기는 돌아오고 싶어질 때 끊자. 유럽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맛없는 레드 와인 한 모금을 홀짝이고 나서야 실감했다.  

'첫 번째 와인, 아. 이제 정말 여행의 시작이구나' 막연한 두려움과 묘한 전율, 그리고 흥분. 그래서인지 입술에 닿는 액체가 평소보다 조금 더 떫게 느껴졌다. 


운전도 못 하는 바보가 퇴직금을 밑천 삼아 떠난 ‘뚜벅뚜벅 와인 여행’. 60일간 10개국에서 마신 211병의 와인 여행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포도밭에서 해본 내 인생 최초이자 최고의 도둑질과 독일 와인 포차, 이탈리아 광장에서의 노상 음주, 그리고 프랑스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받은 프로포즈까지 결코 잊을 수 없는 수많은 에피소드를 하나씩 풀어갈 예정이다.  

와인 한 잔과 에펠탑 한 시선

누군가는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두 달 간 와인 여행 후 당신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같습니다. 여전히 좋은 사람과 많은 와인을 기울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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