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by WineofMuse

화창한 오후였다.

뜬금없는 미풍에 마음이 살랑거려 조퇴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늘 그렇듯 중문을 밀고 조용히 안방 문을 열었다.

얕게 열린 문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스르륵 제 역할을 했다.

J는 소리 없이 손잡이를 놓고 말았다.

익숙한 엉덩이가 리드미컬하게 누군가의 품속으로 밀려 올라갔다.

심장이 서걱거려 눈앞에 모래가 밀려오듯 뿌연 눈물이 맺혔지만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분명했다.

불과 이틀 전만 해도 나를 향하던 그의 골반과 묵직하면서도 뭉근한 엉덩이는

타인을 향해있었다.

그것도 나와 적당히 친한 그녀에게로.

마치 몰래 훔쳐본 사람처럼 수치심과 패배감을 느낀 나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서로에게 심취한 두 사람은 나를 잊고 몰입해있었고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분한 마음보다는 그 복스러운 엉덩이가 내 친구를 밀어 올리는 그 환희의 순간을 목격했다는

사실에 어색한 패배감을 만끽하고 말았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녀와 즐거이 몸을 섞어 내고 있는 것일까.

내 탓이 어딘가는 있을까?

그는 무슨 핑계를 장황하게 늘어놓을까.

당장 찾아낸다고 그게 과연 합당한 이유로 등극할 수는 있을까.

꼬리에 꼬리는 무는 질문은 자책으로 변해갔고 어디 가도 없을 뾰족한 묘수는 내 안에 있을 것만 같았다.


눈물이 나지 않는 대신 근처의 마트로 왔다.

오늘 저녁거리로 무쳐낼 간단한 푸성귀나 고깃거리를 만지작거렸다.

콩나물을 삶고 반은 무치고 반은 국으로 둬도 되겠다 싶다.

시금치는 너무 비싸다.

제육은 고춧가루보다는 간장으로 재우자.

한 끼로 끝날 저녁을 요령껏 재주를 피우다 보면 두 끼도 넘게 찬을 마련할 수 있다.

오늘 저녁 무쳐낼 콩나물에 고춧가루를 넣을지 말지에 관한 소소한 고민을 하며 걸어온 나의 저녁은

어쩐지 모를 비장한 고민으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잔인한 생각보다 스스로의 처량함이 먼저 밀려온 걸 보면 언젠가는 당할 일이란 걸 육감적으로 알고 있었던 걸까.

의외로 큰 소동은 없었다.

주저앉아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던지고 해명하기 바쁜 그의 난처한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침드라마의 신파에 불과했다.

지금 당장 처한 고민은 냉장고에 반찬이 없다는 것과 고장 난 마음을 나 스스로도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것 정도겠다.

담담하게 생각해보니 오늘 저녁에는 고춧가루 따위는 쓰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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