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주주총회는 회사 경영의 투명성과 합법성을 공식화하는 법적 절차의 자리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주주총회가 허무하게 끝났다”는 표현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가 IR을 하면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정상적인 주주총회는 오히려 허무하게 끝나는 게 맞다.
대부분의 정기 주총은 이미 이사회에서 안건을 철저히 검토하고, 주주에게 충분히 사전 통지되며, 이견이 조율된 상태로 진행된다.
그 결과, 현장에서는 이견도, 충돌도, 고성도 없이 조용히 표결만으로 안건이 통과된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회사와 주주 간 신뢰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반대로 주총이 시끄러운 경우는 대부분 내부에 갈등이 있다는 신호다.
실제 사례만 봐도 그렇다.
사조산업은 ‘3%룰’을 우회하려는 대주주 측과 소액주주 간의 갈등으로 격론이 벌어졌고,
아워홈과 한국앤컴퍼니는 오너 일가의 지분 다툼이 주총 현장에서 폭발했다.
헬릭스미스나 정원엔시스처럼 결의 과정에 법적 하자가 있어 취소 소송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결국, 주총이 시끄럽다는 건 회사 내부의 통제력과 지배구조가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소액주주의 권리 보호, 경영진 견제 등 주총의 역할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 기능은 철저한 사전 준비와 투명한 소통, 정기적 IR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주총 현장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든다면, 이미 커뮤니케이션은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주총회가 허무하게 끝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 허무함 속에는 철저한 준비, 사전 조율, 그리고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기초가 존재한다.
회사가 안정되고, 주주가 신뢰하며, 안건이 조용히 통과되는 주총이야말로 진짜 모범이다.
진짜 위기는 주총장이 시끄러울 때가 아니라, 평소 소통이 없을 때부터 이미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매년 정기 주주총회 시즌이 되면, 언론과 시장은 ‘이슈가 될 만한 주총’을 주목한다.
사외이사 교체, 배당금 논란, 경영권 분쟁, 소액주주의 반발…
하지만 IR담당자의 입장에서, 주총에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단 하나다.
“이번 주총, 너무 허무하게 끝났어요.”
이 말은 ‘의미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주주총회가 별탈 없이 끝났다는 것은, 그 기업의 거버넌스가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다.
주총은 기업의 주인인 주주들이 모여 회사의 중요한 사항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자리다.
그 과정이 조용하고 차분하게, 합리적으로 진행됐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뢰받는 회사라는 뜻이다.
주총은 법적으로 규정된 기업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다.
회계연도가 끝난 후, 기업은 정기적으로 주주들을 모아
재무제표 승인
이사 및 감사 선임
배당 결정
정관 변경
등의 안건을 심의하고 승인받는다.
이 모든 절차는 회사의 투명성을 주주에게 직접 보고하고, 기업의 향후 방향성을 정당하게 확정짓는 자리다.
즉, 주총은 주주권의 상징이며, 동시에 기업과 투자자 간 신뢰를 연결하는 고리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이상적인 주총이 오히려 ‘조용하고 빨리 끝나는 것이 최선’이라는 정서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은 아주 정확한 진실을 담고 있다.
1) 모든 게 준비되었다는 뜻
허무하다는 건, 이슈가 없다는 뜻이고, 이슈가 없다는 건 경영진이 충분히 설명하고, 주주들이 납득했다는 뜻이다. 즉, 그 회사는 사전 IR과 내부 조율, 공시 준비가 철저했으며, 주주와의 관계도 신뢰 기반 위에 있다는 증거다.
2) 결정이 아니라 확인의 자리
좋은 기업의 주총은 ‘무엇을 결정하는 자리’라기보다
이미 합의된 방향과 전략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자리’다.
IR담당자는 그 과정을 위해 수개월 전부터 NDR을 돌고, 자료를 만들고, 소액주주와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그래서 회의는 허무하지만, 그 허무함 뒤엔 치열한 준비가 깔려 있다.
3) 신뢰가 있는 회사일수록 조용하다
주총장에서 질문이 없다는 건, 그 회사의 경영진이 신뢰받고 있으며, 주주들이 이미 설명에 충분히 납득했다는 뜻이다.
주총이 시끄럽고, 충돌이 발생하는 기업일수록 그 전부터 설명의 부족, 전략의 불투명, 신뢰의 결핍이 누적돼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경영권 분쟁이 한창이던 당시, 한진칼의 주총은 소액주주 연합과 KCGI(강성부 펀드) vs 조원태 회장 측의 위임장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당일 주총에서는 발언권을 두고 고성이 오갔고, 보안 인력이 개입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표대결에서 조 회장이 승리하긴 했지만,
기업 이미지에 큰 상처를 남겼고, 거버넌스 이슈는 투자자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회사의 매각 이슈와 맞물려 진행된 주총은 주주 명부 폐쇄일 논란, 의결권 행사 제약, 절차적 하자 등으로 법적 소송으로까지 번졌다.
이 과정에서 주가도 크게 흔들렸으며, 경영진의 불투명한 의사결정과 소통 부재가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러한 사례는 ‘주총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결코 부정적인 표현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오히려 주총이 너무 시끄럽게 끝난다는 건, 이미 그 회사에 내재된 갈등 구조나 신뢰 부재가 표출되고 있는 증거일 수 있다.
IR담당자로서 처음 주총을 준비할 때는
“뭔가 보여줘야 하나?”, “주주들이 감동할 수 있는 발표를 해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알게 됐다.
진짜 잘 된 주총은 아무 일도 없는 주총이다.
질문이 없고, 안건이 모두 통과되고, 회의는 30분 안에 끝나고,
주주들도 “예상대로네요”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그 회사가 얼마나 준비되어 있고, 얼마나 신뢰받고 있으며, 얼마나 안정적인가를 보여
주는 바로미터다.
주주총회는 허무하게 끝나야 한다.
왜냐하면, 기업 경영은 드라마가 아니라 시스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