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첫 주말, 행경산악회 5월 정기 산행은 대둔산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날씨는 우리의 계획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하루 종일 비가 예보된 탓에 우리는 플랜 B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산행지는 문경새재 과거길로 비를 맞으면서 걸어도 좋을 길이다.
이른 아침부터 비는 이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참석하는 회원 대부분은 취소하지 않았다. 빗속을 뚫고 정시에 버스에 오른 이들의 표정에는 오히려 묘한 설렘마저 엿보였다. 단순히 산을 오르는 일정이 아닌, 비에 젖은 시간 속으로 함께 들어가는 여정이 될 것 같은 예감. 그렇게 우리는 문경새재 제1주차장에 도착했다.
문경새재 과거길은 단순한 트레킹 코스가 아니다. 이 길은 조선시대 영남 지역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던 가장 중요한 고갯길이었다. 영주 죽령, 영동 추풍령과 함께 조선의 3대 고갯길로 꼽히지만, 유독 문경새재에 얽힌 이야기는 특별하다.
이 길을 선비들이 가장 선호했던 이유는 지명에 숨어 있다. ‘문경(聞慶)’—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 죽령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져 낙방”,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은 이 길의 인기를 더욱 높였다. 장원급제의 꿈을 품은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택했고, 수많은 사연과 간절함이 이 길 위에 쌓였다.
그 길을, 오늘 우리는 다시 걷는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고갯길. 시험을 보러 떠나는 긴장된 발걸음은 없지만, 인생이라는 시험장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사연을 가슴에 품은 채, 비 내리는 문경새재의 흙길을 따라 나섰다.
우비를 챙기고, 우산을 쓰고, 조심스레 걷기 시작했다. 초입은 이미 질척했고, 길 옆의 계곡은 불어난 물로 더욱 요란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불편함보다는 평온함이 먼저 찾아왔다. 도시에서 잊고 지낸 자연의 촉감, 냄새, 소리들이 오롯이 스며들었다.
문경새재는 흙길이다. 그리고 그 흙길은 비를 머금었을 때 가장 진한 감성을 품는다. 치톤피드를 뿜는 젖은 나무들, 발밑에서 찰박거리는 진흙, 잎사귀를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여기에 우리들의 목소리까지 더해져, 이 트레킹은 마치 한 편의 오래된 라디오 드라마처럼 아날로그적 정서를 자극했다.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예상과 다르게 오히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얼굴에 묻은 빗물마저도, 젖은 옷자락조차도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주는 매개였다. 1관문인 주흘관에서 단체사진은, 오늘 이 특별한 산행의 시작을 기록한 따뜻한 증표가 되었다.
코스를 따라가다 만난 오드막, 그곳이 오늘의 하이라이트였다. 새벽부터 정성껏 준비해 온 도시락들이 펼쳐졌다. 김치, 파전, 홍어, 문어무침, 닭발, 컵라면, 과일, 그리고 빠질 수 없는 막걸리까지. 비가 만들어 준 야외 잔칫상이었다(누군가가 역대급이라 했는데... 생각해보니 이보다 더 풍복한 간식은 없었던거 같다).
비 맞은 채 우두커니 앉아서 도는 서서 막걸리를 따르며 나눈 이야기 속에는 단순한 ‘맛’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과거 이 길을 따라 걸었던 선비들의 심정을 다시 떠올렸다. 과거 급제를 꿈꾸며 문경새재를 넘어가던 그들의 설렘과, 낙방하고 돌아올 때의 허탈함. 그런 선조들의 마음은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꿈이 있었고, 현실이 있었고, 그 사이에서 묻는 수많은 질문들이 있었다.
우리 역시 대표이사로, 창업가로, 가장으로 이 시대를 걷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 꿈을 어디쯤 실현했는지, 혹은 어떤 문제를 돌파해야 할지, 오늘의 이 산행은 그 모든 질문을 마음속에 불러왔다. 비가 와서일까, 사람들은 말이 많았고, 표정은 깊었다.
그렇게 우리는 제3관문 조령관(해발 665m)에 도착했다. 빗속에서 찍은 단체사진은 모두의 눈가에 맺힌 미소를 담고 있었다. 비는 점점 세졌지만, 걷는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마치 이 비가 우리의 무거운 생각들을 씻어주는 듯했다.
“인생 뭐 있나, 이렇게 비 맞으면서 문경새재 함께 걷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행복이지.”\
누군가가 내뱉은 말 한마디가 우리 모두의 마음을 대신해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내려와, 뒷풀이 장소인 '샛고랑펜션식당'에 도착했다. 훈훈한 실내, 따뜻한 음식, 푸짐한 대화. 취나물 솥밥과 더덕, 훈제오리구이는 오늘의 산행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문경새재 과거길은 이제 ‘한국관광 100선’에 이름을 올린 명품 트레킹 코스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그 이상의 의미를 안고 이 길을 걸었다. 단지 아름다운 경관이나 편안한 길 때문이 아니었다. 장원급제의 꿈을 안고 걷던 옛 선비들의 길을 따라, 지금의 우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얹어 걸었다.
비가 아니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감정들, 만나지 못했을 이야기들이 오늘 우리 사이를 채웠다. 우중산행은 그렇게 우리를 더 가깝게, 더 깊이 연결해주었다. 플랜 B였지만, 마음속 기억은 오히려 플랜 A였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다음 산행이 어떤 날씨든, 어떤 코스든, 오늘처럼 함께라면 언제나 최고의 하루가 될 것임을.
A 대신 B
비가 내려 대둔산 대신 문경새재로 변경되었다.
오랜만에 산행을 선택했기에 설렘반
두려움반으로 기다렸는데 암산이라
안전을 위해 변경되었다.
가을에 단풍이 예뻤던 문경새재를 떠올리며 도착한 그곳엔
보슬보슬 비가 내렸다.
선비들의 과거급제를 꿈꾸며 걸었던 그 길을 우리는 걸었다.
계곡따라 시원하게 들리는 물소리 굽이굽이 나무끼리 엇갈리며
연두빛 초록의 풍경이 눈을 정화시켰다.
머리속엔 아무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좋다'의 감탄사만 연발 되새김질 하듯
가슴속에 쉽사리 마시지 못한 신선한 공기를 펌프질했다.
비우고 채우고
경험을 사기위해 선택한 여정
그 여정이 즐거움을 더한것은 사람들의
따뜻함 그래서 대신이란 이유로 실망할 이유가 없었다.
어디를 가든 분명 우리는 정상의 마침표를 찍고 내려왔을 것이다.
가슴가득 초록의 잔치속에 새로운 바람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흐믓한 미소가 번진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