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란다. 어느새 초등학생이 된 아이를 보고 있자면, 유아기의 말랑말랑하던 두뇌와 꼬물거리던 손가락 발가락은 어느새 단단해져 있다. 작은 발뒤꿈치에는 굳은살이 올라오고, 짧고 느렸던 말들은 똑 부러진 문장으로 바뀌었다. 그 변화가 낯설다. 사랑스러움이 사라진 게 아니라, 속도가 너무 빠르다. 놓칠까 봐 아쉽고, 따라가지 못할까 봐 두렵다.
스스로 매겨보는 나의 육아 점수는 100점 만점에 50점 남짓이다. 교대 근무를 하며 하루 걸러 하루는 집에 없었고, 주간 근무 날에는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다. 아이를 안아주고, 등을 토닥이며 잠재울 시간의 절반 이상을 바깥에서 흘려보냈다. 그 시간, 아내가 내 몫까지 아이들과 함께 해 주었다. 내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 믿었고,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기에 힘들다고 느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의 부재가 남긴 빈자리는 아이들에게 단지 ‘아빠가 없는 시간’이 아니라 ‘놓쳐버린 온기’였다.
하지만 코로나가 모든 걸 바꿔놓았다. 무급 휴직으로 인해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었고, 마침내 아이들의 눈높이에 함께 서 볼 기회가 생겼다. 게임을 같이 하고, 저녁 준비를 돕고, 낮잠을 같이 자는 그 평범한 순간들이 낯설 만큼 깊게 스며들었다. 아이들과의 관계는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다시 짜였다. 아직도 아이들은 “아빠 오늘은 뭐 하고 놀까?”라고 묻는다. 나를 기다려주는 그 마음에 매일 마음이 젖는다.
기억이라는 건 형태보다 감정의 온도로 남는다. 아이들은 유아기의 구체적인 장면은 잊혀졌을지 몰라도, 그 시절의 공기와 냄새, 손의 감촉 같은 감정의 기억은 몸에 새겨진다. 여전히 아이는 내 무릎 위에 앉으려 하고, 자꾸 내 손을 잡는다. 그게 다행이다. 아직은 품 안에 있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조만간 이 손은 나를 지나쳐 또래 친구의 손을 잡을 것이고, 집보다 바깥이 더 편한 공간이 될 것이다. 그건 막을 수 없다. 막아서도 안 된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은 더욱 귀하다. 돌아오지 않을 오늘이기에, 그 손을 잡아주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
우리가 함께 걷던 벚꽃길, 놀이터에서 터졌던 웃음소리, 아빠 품속에서 잠들던 그 밤의 체온. 이 모든 순간이 언젠가 아이의 마음 어딘가에 부드럽고 따뜻한 결로 남아주길 바란다. 육아는 늘 후회와 불안 사이를 걷지만, 나는 바란다. 완벽하진 않아도 진심이었다면, 그 기억은 따뜻할 거라고.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아이의 아빠로서 어떤 존재인가. 여전히 손을 내밀어주는 이 귀한 날들 속에서, 나는 얼마나 진심으로 아이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가. 놓치고 후회하기 전에, 오늘을 온전히 살아내고 싶다. 품이 닿는 거리에서, 내가 아빠라는 이름으로 무너지지 않고 곁에 있는 것. 지금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