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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memike Sep 16. 2020

테넷에 관하여

스물한번째 이야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영화의 시각-청각적 연출

영상미, 훌륭하다. 음악은 적재적소에 들어갔다. 실제 놀란 감독의 작품을 세밀하게 비교 분석해본 적은 없지만 그 유사성이 느껴진다. ‘테넷’의 첫 장면은 정적과 함께 조커 일당의 침투씬으로 시작하는 ‘다크나이트’를 연상시킨다. 데이비드 워싱턴이 마이클 케인을 만나러 식당에 들어가는 장면과 극 중 캣을 절벽에서 만나는 장면은 고풍적이다. 사토르가 캣에게 화내는 장면에서 대사와 함께 위협적이고 웅장한 배경음악이 나오는데, 이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가 하나의 오페라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과거와 현재, 혹은 현재와 미래의 주인공이 벌이는 액션씬은 처음 보면 당황스럽다. 때리는 것인지 피하는 것인지, 시간을 순행하는 것인지 역행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인셉션’에서 조셉 고든 래빗의 액션씬이 주는 신선함을 연상케 한다.




2. 크리스토퍼 놀란의 세계관



오랫동안 인간은 자신의 생활을 구성하는 기준이 되는 틀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껴왔다.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어떻게’와 ‘왜’를 설명할 질서를 확립해야 할
필요성은 모든 사회에서 발견되는 문화형성의 필수요소였던 것이다.

                                                                                                                              「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크리스토퍼 놀란은 지속적으로 세계관 자체에 관해 다룬다. ‘인셉션’에서 꿈과 현실, ‘인터스텔라’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했다. ‘테넷’은 이전의 두 영화를 합쳐 놓은 듯한 세계관을 그린다. 시간의 순행과 인버젼(Inversion) 혹은 역행, 그리고 무엇이 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과 그 속에서의 현실을 묘사한다. 놀란 감독의 세계관은 과학적 사실 관계를 떠나 호접지몽에 대해 이야기한 장자와 물리학적 지식과 함께 시공간과 자유의지에 대해 역설한 테드 창과 같은 연장선 위에 있다. 그 셋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세계 자체에 대한 ‘이해’를 위해 발생한 세계관이 어느 순간부터는 ‘이해’로부터 괴리되어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놀란은 분간할 수 없는 두 세계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현실이라고 말한다. 이는 마지막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3. 스토리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어느 순간부터 상당히 많은 부분을 포기했다. 중요한 단서들이 나오는 대사 자체도 빠르기도 하고, 우리가 익숙한 시공간과 인버젼된 시공간을 분간할 수 있는 여러 영화적 장치를 모두 확인하는 것이 어렵다. 호흡기, 식별창, 빨강과 파랑은 지속적으로 나타나지만 결코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그것이 정확하게 언제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플롯 자체도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극중 대사에서 말한듯이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라는 것이 감독의 의도였다면 혼란에 빠진 관객은 의도 구현에 성공한 증거일 것이다.




4.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벽, 그리고 사라진 벽 대칭


건축을 경계를 통해 감각의 조건인 현상을 구현하는 작업이라고 할 때,
경계는 ‘차이’에서 발생한다. 차이가 없다는 것은 경계가 없다는 것이고
차이의 강도가 높으면 경계가 명확하게 구별된다는 뜻이다.

                                                                                                                           「건축, 감각의 기술」, 전유창



두번째 영화 관람 시작 전, 빨강과 파랑이 중요함을 인지하고 이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보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벽이 보였다. 오슬로 프리포트, 탈린의 프리포트, 그리고 스탈스크-12는 극 중 가장 중요한 장소다. 오슬로에서는 펜타곤 안에 벽과 유리창을 두고 빨강과 파랑의 세계가 나뉜다. 탈린에서는 오슬로와 같이 벽과 유리창 외에도 움직임에 따라 보이기도 하고 가려지기도 하는 철창이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탈스크-12에서는 두 시간대가 하나의 공간에서 진행된다.



세 장소에서 빨강과 파랑의 세계는 경계를 기점으로 대칭적이며 동시에 비대칭적이다. 특히 스탈스크-12에서 RPG로 건물을 폭파시키는 장면은 상하좌우 모두 역전되기도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 세계의 경계는 점진적으로 흐려진다. 콘크리트벽의 오슬로, 철창의 탈린,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스탈스크-12. 물성 자체만으로도 극중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경계는 희미해진다. 이는 닐(로버트 패틴슨)이 말했듯이 인버전된 세계에서는 그것이 인버전된 것인지 아닌지 분간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테넷’의 식별창은 ‘인셉션’의 토템처럼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구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극 중 마지막 공간에서는 식별창의 역할이 의미가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내 우정은 여기서 끝이지만 자네의 우정은 이제 시작이야", TENET 중 닐의 대사



5.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What has happened has happened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다. 이는 ‘인터스텔라’의 ‘머피의 법칙’과도 맞닿아 있다. 이는 ‘인터스텔라’의 ‘머피의 법칙’과도 맞닿아 있다. 언뜻 체념적으로 보일 수 있는 두 영화의 말은 시간 앞에서 무의미해 보이는 자유의지에 관해 의문하게 만든다. 닐은 이에 대해 세상에 대한 믿음이지 방관의 핑계가 아니라고 말한다. ‘테넷’의 세계관은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 둘은 상호적이고 분간할 수 없을 때가 생긴다. 그 속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Reality)이다.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현재와 과거는 과연 의미가 있을까. 과연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나의 끝이 너의 시작이 눈 앞에 있을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는지’이고,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 즉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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