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번째 이야기
인간이 생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각 세포와 기관에 필요한 산소를 공급해주기 위해서 충분한 호흡이 필요하고, 각종 화학 작용을 위한 원동력인 영양소가 필요하다. 그리고 물도 필요하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필요재는 일정 수준이 넘으면 사치재가 되기도 한다. 물도 예외는 아니다. 사치재로서의 물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물의 범주는 굉장히 넓다. 생명체 내에는 물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우리가 먹는 음식에는 거의 모두 물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또 공기 중에도 수분은 포함되어 있다. 들숨과 날숨에도 모두 미세하지만 수분이 포함되어 있다. 마스크를 쓰고 숨을 계속 쉬다 보면 그 안에 물이 서리는 것도 그 이유다. 마스크 안과 밖의 온도 차이든, 실제 날숨에서 나오는 수분이든. 좀 더 ‘물 같은’ 물을 살펴보자면 우리가 아는 다수의 음료가 포함된다. 술, 커피, 차 모두 물의 다른 형태다. 물 부족 국가에서 물을 펑펑 쓰는 것도 물을 사치재로 쓰는 것이겠지만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부분은 음료다.
집마다 물을 마시는 방법은 다양하다. 정수기를 렌트 혹은 사서, 정수기가 딸린 냉장고를 통해, 그리고 페트병에 담긴 물을 사서 마시기도 한다. 또 수돗물을 끓여 마시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티백이나 찻잎, 원두를 이용해 2차 가공된 물을 마시는 것까지 생각하면 물을 마시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집마다 물을 마시는 방법이 다른 이유는 물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시간과 효율의 문제로 필수 수분 섭취량, 혹은 약간의 여유분만 충족시키겠다는 사람. 물을 내려 마시며 향과 풍미를 느끼고자 하는 사람. 건강상의 이유로 물을 끓여 먹는 사람. 그 이유는 이 외에도 다양할 것이다.
시간을 들인다는 것은 정성을 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며, 시간을 들이는 대상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더불어 정성을 들이는 일은 그 시간을 소중히 여김을 뜻하기도 한다. 물을 내려 마시는 행위는 시간을 소요한다. 커피 가루 혹은 찻잎에 물이 떨어지고, 커피와 차의 향이 우러나오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좋은 커피와 차를 위해서는 각기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정제의 시간이다. 일상의 독으로 피곤해진 몸과 마음을 녹이는 시간이다. 물을 다 내렸을 때도 한번에 다 마시지 않는다. 첫 입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입은 그 풍미가 다르다. 또한 차의 경우 한 번 내렸을 때와 그 이상 내렸을 때 맛이 다르다. 차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세 번째 내렸을 때 그 향과 풍미가 제일 좋다고 한다. 꽤나 시간이 많이 드는 행위다.
나와 인연이 있는 스님은 내가 갈 때마다 차를 직접 내려 주신다. 나무와 돌이 섞인 다기 세트를 갖추고 계신 스님은 따뜻한 물로 다기를 먼저 데우신다. 물을 차판 위에 바로 붓는데도 물이 차판 아래로 흘러가 탁자는 젖지 않고 차를 즐길 수 있다. 그렇게 차 종류를 달리 하며 두어 시간 이야기를 나눈다. 차 자체보다는 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것과 나누는 행위 자체에 더 가치를 두는 일이다. 차와 커피를 함께 하는 행위는 앞에 앉아 있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있으며 아낌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을 들여 우려낸 물을 함께 마시는 건 같이 있는 사람과 보내는 그 시간을 소중히 여김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손님에게 차를 권하는 것이지 않을까.
필요 이상의 시간을 들여 물을 마시는 행위는 우리에게 어떠한 만족감을 선사한다. 향과 풍미가 주는 안도감이 되었든, 그 기다림의 시간을 통한 정제이든, 혹은 함께 하는 사람과의 시간이든. 물은 알게 모르게 꽤나 사치스러운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