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여섯번째 이야기
‘2021년 젊은 건축가상’ 심사는 원오원의 최욱 대표의 말로 시작했다. 최욱 건축가는 심사의 주안점으로 ‘한국 건축가로서의 상(figure)을 만들 수 있는지’와 ‘어떤 문제 의식을 갖고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1차 포트폴리오 심사를 거쳐 2차 심사에는 총 8개 팀(김남건축, 에이루트건축사사무소, 일상건축사사무소, 건축사사무소 에스에프랩, 아키후드건축사사무소, 아파랏 체 건축사사무소, 중원건축사사무소, 구보건축)이 올랐다. 이는 유튜브 젊은건축가상 채널에서 다시 볼 수 있다. 건축가로서의 마음가짐, 혹은 태도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건축은 생각에서 시작되어 물리적 실체를 가짐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건축가는 건축주와 건축물이 들어설 대지를 만나 자신의 생각을 도면 위에 옮기는 사람이다. 이는 시공을 거쳐 건축가의 상상과 비슷한 형상을 갖게 된다. 형상은 해석을 이끈다. 해석은 생각에 관한 것이다. 때로 해석하는 사람이 유추한 형상을 만든 자, 즉 건축가의 생각은 실제 도면을 그릴 때의 건축가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 형상을 만든 자와 이를 보는 자의 생각의 괴리는 늘 발생한다. 많은 것을 상상하고 계획하지만 모든 것을 설계하고 의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괴리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전자는 건축에 사람의 삶이 유입되며 그 사람의 삶이 의도치 않은 우연 덕에 윤택해지는 경험 때문일 것이며, 후자는 건축이 우연히 삶을 해치는 요소로 작동하고 이는 온전히 건축가의 책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형상은 생각의 외연이며, 적어도 그 외연의 중심은 사람에 있어야 한다.
태생적으로 건축가는 애매한 위치에 있다. 건축가는 개인, 혹은 건축주와 사회 사이에 존재한다. 건축물은 필히 건축주의 의견이 반영된다. 그렇지만 건축물은 지어지는 순간 주변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사회의 의견이 중요한 순간도 있다. 또한 여기에 건축가 본인의 정체성, 혹은 개성이 작용하기도 한다. 건축이 한 사람의 개인 소유라고 할 수 없는 이유다. 때문에 건축가는 늘 고민한다. 자신의 건축적 정체성은 무엇이며, 이는 얼만큼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 건축주 혹은 사회의 의견 앞에서 건축가의 제안은 무로 돌아가는 때도 있는 반면 자의식의 과잉 표현으로 건축가만을 위한 건축이 되기도 한다. 비평 앞에서 건축가의 정체성은 늘 시험대에 오른다. 전문가로서 개인과 사회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해야 할 때도 있으며 타당한 비평 앞에서는 자신의 건축적 행위에 대한 겸허한 성찰이 필요할 때도 있다. 건축가마다 관심 있는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는 그 경중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예리한 문제의식으로 바라보고, 이를 지속적으로 건축적으로 끌고 가는지다.
심사를 진행하며 ‘마음’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한다. 어떤 마음으로 이런 행위를 했는지. 건축은 사람, 지역 사회, 그리고 자연과 관계를 맺는다. 건축가는 관계의 가능성을 도면 위에 그리는 사람이다. 건축가가 그은 선 하나는 새롭게 맺어질 관계를 정의하고, 동시에 이는 그 선택으로 인해 또 다른 잠재적 관계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건축가의 몫이다. 그래서 마음이 중요하다. 쉽게 그은 선은 삶 속에 오랫동안 실재하기 때문이다. 건축물이 들어선 이후의 풍경은 이가 들어서기 전의 풍경과 다르다. 맺고 끊어진 관계 때문에 삶이 바뀌고, 인식이 바뀌고, 풍경이 달라진다. 건축에서의 무수한 선택은 그런 관계에 대한 건축가의 태도를 대변한다. 눈 앞에 현존하는 형상에서 마음이 느껴지는 건축이 좋은 건축이다.
한국적인 것은 무엇이냐는 대화 속에 지인은 한국은 정체성이 부족하다고 했다. 수백 년을 이어온 왕조가 있던 이 땅에 20세기에 찾아온 크나큰 내외부적 단절 때문이었을까. 한반도는 지리적 특성 상 언제나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유래를 알 수 없는 문화, 한국적이라고 하기엔 묘한 것들. 최욱 건축가는 ‘병치’를 한국의 중요한 성질이라고 말한다. 병치. 두 가지 이상의 것을 한곳에 나란히 두거나 설치함. 이 땅은 여러가지의 것들이 혼재하는 곳이다. 역사적 단절로 인해 우리의 정체성이 이어지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그 단절 속에도 퇴적된 시간의 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에 존재하는 한 이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든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땅의 것을 기반으로 나고 자란 것이다. 목조 건축만이 한국적인 것은 아니다. 도심 속에 흔히 보이는 빨간 벽돌의 빌라, 상가 건물의 화려한 입간판, 어느 순간 정제되어 매끈한 입면을 과시하는 신도시의 건물, 건물만 보면 이곳이 어느 도시인지 알 수 없는 아파트 단지. 이 모든 것이 이 시대 한국의 모습이다. 혼재와 비조화 속에서도 우리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젊은 건축가상 심사는 무엇을 한국적으로 바라볼 수 있느냐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