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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memike Aug 15. 2021

삶의 형상

여든한번째 이야기


다수의 도자기는 기능에서 그 형태가 시작한다고 한다. 그릇이나 병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오목한 형상을 갖는다. 꼭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기능은 형태의 기원이 된다. 건축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오랜 시간 논쟁거리가 된 명제가 있다: ‘Form follows function’와 ‘Function follows form’. 전자와 후자 모두 형태와 기능의 선후 관계를 논한다. 개인적으로 태초의 건축은 자연으로부터의 위협을 막기 위한 기능으로부터 벽과 지붕이 건축 요소로서 등장했다고 생각하기에 기능이 형태에 선행한다고 생각한다. 형태가 기능에 선행한다고 보는 입장은 근현대에 들어 건축가의 조형 의지가 부각되며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무엇이 먼저인지 따지는 것은 무용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관심이 가는 점은 어떠한 형상 뒤에 그 형상을 만들어낸 배경이 느껴질 때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 실외기가 눈에 들어왔다. 최근 지어진 아파트는 실외기실을 따로 마련해서 층마다 같은 위치에 실외기를 실내에 설치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미관상의 이유로 실외기실은 배기를 위한 구멍을 제외하고는 아파트 입면 색 계획에 맞게 깔맞춤을 한다. 반면 옛날 아파트는 실외기가 외벽에 설치된 경우도 있고, 베란다 안에 설치된 경우도 있다. 이는 공동주택의 경우 각 세대에 발코니 등 세대 안에 냉방설비의 배기장치를 설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한 것이다. 외벽에 설치된 경우는 규정 적용 시기에 따라 외벽 설치가 가능했던 시기에 설치된 것이다. 이는 지역마다 또 다른 양상을 띄고 있다. 다시 옛날 아파트의 실외기 위치를 유심히 살펴보면 층마다 베란다 위치가 보통 같기 때문에 실외기도 비슷한 위치에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10여년 전쯤 유행했던 발코니 확장 공사가 만든 풍경이다. 발코니 확장을 해서 베란다가 거실이나 방의 일부로 편입된 경우, 실외기는 확장 공사를 하지 않은 베란다에 위치한다. 그래서 실외기만 봐도 그 집이 발코니 확장 공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있다. 


형상이 말하는 삶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다.


누군가의 책상, 모니터 왼편에 동그란 커피 자국이 은은하게 남아있다. 마우스는 키보드의 오른쪽에 있다. 그 책상 주인은 아마 오른손잡이에, 일을 하는 중간중간 커피를 모니터 왼편에 두고 마시는 사람일 것이다. 습관은 시간이 퇴적된 행위다. 연필을 오래 쓴 사람은 연필이 닿는 손가락 마디가 움푹 파이고, 거기에 굳은살이 생긴다. 신발 장인은 신발의 상태만을 보고도 그 주인의 걸음걸이와 성향까지 유추할 수도 있다고 한다. 형태 혹은 형상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진 않아도 좋다. 그렇지만 형태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다. 형상은 삶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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