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외수 님을 기억하며
누군가의 에세이를 읽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사고의 범주가 좁아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올해 첫 독서는 에세이는 아니고 산문집이다. 위트와, 상식과, 견해가 풍족한 책이다. 작품으로만 접하던 픽션에서 더 들어가, 이외수 선생님의 몰랐던 면들을 떠나, 그저 소설가의 삶에 대해 궁금했다.
몰랐던 작가가 된 이외수의 이야기. 29년 전 초판을 펼쳐 들었다.
화가를 꿈꾸는 학생이었으나 유년, 청년 그리고 장년까지. 가난이라는 악귀는 물러가지 않았고, 정치적 압박에 그를 헤아려주던(500원으로 머리 자르고 오라고. 라면 하나 20원 하던 시절 한 박스로 한 달을 버티던 시절) 학장이 물러나고 그도 정치적 사회상을 결국 이기지 못해 중퇴.
1961년 쿠데타로 장악한 후, 1979년까지 18년간 군사정권으로 암울했던 역사의 시절을 그는 피부로 느끼고 이렇게 회고했다.
자유는 파멸되어 있었고, 인권은 몰수되어 있었다. 정의는 유배되어 있었고, 용기는 실종되어 있었다.
연애시절. 다니던 직장에서 부적격자로 밀려나 백수건달로 전락. 세상만사 염증을 느끼고 춘천 외곽의 샘밭이라는 마을에 창문도 없는 방 한 칸을 얻어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20~30대 술로 연명하다시피 한 삶에서, 40대에 들어 베스트셀러에 등단할 때까지 이렇다 할 방한칸 없는 생활. 소설가 이외수의 아내는 심각한 우울증을 겪을 정도였다.(의사의 입원 권유 수준)
팔만대장경에는 술이 번뇌의 아버지라고 은유되어 있지만,
나는 술을 해탈의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첫 장편 소설로 인정받은 ‘꿈꾸는 식물’이란 작품은 장미촌이라는 사창가로부터 발현된 작품으로, 그는 소설가로 직업을 꿈꾸던 시절 돈이 없어 길에서 사창가의 힘을 빌어 사는 동안에도 소설 창작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심지어, 아내를 데리고 사창가 장미촌에서 술을 마시기도 부지기수.
그의 첫 연재소설이자 베스트셀러였던 ‘칼’은 연재소설만 시작하면 끝을 보지 못했던 상황이었고, 그의 가족 모두가 가난에, 그의 아내가 우울증과 같은 최악이라는 상황에 처했을 때 출판사 사장을 찾아가 빚을 낸 상태에서 쓰기 시작한 소설이었다.
외모에서 풍겨 나오는 무심함과는 달리, 그는 지식과 교육에 대한 깊은 고뇌로 생활했다. 그의 고뇌 일부분을 그대로 발췌한다.
지식인들의 지적 허영심이 언어를 질식시키는 경우도 있다. 지식인들이 질식시킨 언어는 대개 간편하면서도 직접적인 전달력이 감소되어 있고 복잡하면서도 간접적인 분석력이 가중되어 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무지보다 무서운 무기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학문이 머리에 소장되어 있는 상태는 학문을 자랑하는 경향이 두드러져 보였고, 학문이 가슴에 소장되어 있는 상태는 학문을 사랑하는 경향이 두드려져 보였다. 전자는 전문용어 그대로를 남발하며, 이론에 적합한 사례를 권위 있는 학자의 논문이나 서적에서 인용하기를 좋아하는 특성을 가지고, 후자는 상대에 따라 전문용어를 적절히 풀어쓰는 일에 능숙해있으며, 이론에 적합한 사례를 가까운 일상에서 찾아내기를 좋아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중략...
‘아이들은 입시에 대한 공포와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 청소년기를 소금에 절인 시래기 같은 몰골로 보내야 한다. 어쩌면 수학공식 1백 개를 외우는 일보다 하늘을 한 번 쳐다보는 일이 더 유용할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어단어 1백 개를 외우는 일보다 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는 일이 더 유용할는지도 모른다. 교육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모든 상현들이 진리는 마음을 통해 깨달아지는 것이라고 설파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학교로부터 시행되는 진리탐구는 마음보다 머리를 중시하는데, 건전하고 아름다운 세상이란 머리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교육은 머리가 좋은 사람을 양산해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좋은 사람을 양산해 내는 것이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시골 깡촌의 분교의 전달원으로 잠시 근무하러 들어가면서 뇌까린 문장.
나는 세상으로부터 유배당한 기분으로 혼자 인적 없는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개떡 같은 세상.
찢어지게 찾아든 가난을 살아내는 화전민조차 천대함에도 불구하고 소설가의 꿈을 더 키우기 시작한다.
얼음밥 네 솥을 먹고 나서야 깨달은 것.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서술적 문체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나는 묘사적 문제로 소설을 쓰고 싶었다. 소설은 문학이고 문학은 예술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이다. 아름다움은 서술될 때보다 묘사될 때 더욱 선명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관측자의 위치가 어딘가에 따라 내가 빌려오는 사물들은 판이하게 다른 상징성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 알았다.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방법.
배반자로부터 보내온 설탕은 달지 않다.
결에게 걸린 태양은 눈무실 수가 없다.
발가락이 자라는 조랑말의 당혹감.
구걸을 중단한 거지의 허영.
쥐를 보면 도망치는 고양이의 비애.
목이 짧은 기린의 절망.
고정관념을 탈피해야 만물들의 외형을 자유자재로 변형시키면서 상징성을 부여하는 능력을 획득하게 되었다.
배고픈 딜레땅트로라 서야 글 쓰는 직업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나는 글을 쓰기 위해 그 어떤 노력을 더 하고 있는가. 일을 해올 때처럼 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원고지 앞에 읊조려본 경험이 몇 번이나 되겠나. 한심하기 그지없는 글의 가치를 나는 기대고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