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옥, 「너의 의미」
흐르는 물 위에도
스쳐 가는 바람에게도
너는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다
한 때는 니가 있어
아무도 볼 수 없는 걸
나는 볼 수 있었지
이제는 니가 없어
누구나 볼 수 있는 걸
나는 볼 수가 없다
내 삶보다 더 많이
널 사랑한 적은 없지만
너보다 더 많이 삶을 사랑한 적도 없다
아아, 찰나의 시간 속에
무한을 심을 줄 아는 너
수시로 내 삶을 흔드는
설렁줄 같은 너는, 너는
어떤 문장은 부정형으로도, 긍정형으로도 같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예컨대, ‘나는 아이스크림을 가장 좋아한다.’라는 문장과 ‘내가 아이스크림보다 좋아하는 것은 없다.’라는 문장은 뉘앙스의 차이는 가질 순 있어도 의미의 층위에선 똑같다.
그럼에도 나는 그 뉘앙스의 차이를 사랑하는데, 그러므로 내가 부정형의 문장들을 편애한다는 말을 듣더라도 할 말이 없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미욱한 관점 안에서 부정형 문장이 낳는 뉘앙스를 가장 탁월하게 다룬 시는 최옥의 「너의 의미」라고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다.
1행에는 그다지 특기할 만한 부정형 문장은 나오지 않는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너의 의미’에 대해서 비유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흐르는 물, 스쳐 가는 바람 같이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대상에도 영속하고 불변하는 발자국을 남길 줄 아는 사람이 바로 ‘너’이다.
2행에서부터 부정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 행은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그 문장의 구조와 내용은 서로에 거울을 비추듯이 정확히 대칭을 이루고 있다. 네가 내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권능을 가질 수 있었다.
3행에 나오는 진술을 당겨와 말하자면, 이는 사랑의 권능을 진술한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별것 아니고 늘 똑같은 일상도 단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특별한 경험으로 전이되는 일들. 아침 출근길에 듣는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 또는 저 멀리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속삭임, 목이 말라 물을 마시는 순간에 들리는 소리.
나의 우주에 ‘너’라는 존재 하나가 들어섰을 뿐인데, 나의 우주 전체가 너를 중심으로 돌게 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사랑이 아니라면 이러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어져 나오는 문장을 보자. 이건 앞서 설명한 사랑의 권능의 부정형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사랑한 ‘너’라는 존재는 평범했던 나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사랑이 끝난 후, 네가 없는 나는 이전의 평범했던 때로도 돌아갈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걸 볼 수 없으니, 남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전엔 남들과 같이 웃을 수 있던 똑같은 농담에도 웃을 수 없고, 내가 좋아하던 음식점에도 갈 수 없다. 그 어느 것에나 네가 있을 것이므로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내 우주에서 배제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다. 내 우주의 한 부분을 잘라서 버려야 하는 것, 이것 역시 사랑이 아니라면 일어나지 않을 험난한 형벌이다.
3행은 부정형의 묘미가 드러난 부분이다. 이 행의 의미는 정말 간단하다. ‘나는 내 삶만큼 너를 사랑했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진술을 시인은 부정형을 이용해 묘사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의미는 정확한 균형이라는 것. 균형은 서로 다른 두 힘이 정확히 같았을 때 발생한다. 그 팽팽한 균형은 또 다른 의미를 배태하기도 한다. 예컨대 내가 만약 삶을 너보다 사랑했다면? 나는 너를 잃어버렸다고 해도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만약 너를 삶보다 사랑했다면? 난 어쩌면 너를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순간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별의 원인은 삶과 너 중에 확고하게 선택하지 못한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4행은 이 시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며,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문장이다. 또한 이 문장은 1행에서 언급했던 ‘너의 의미’의 비유적 표현을 문학적으로 재진술하고 있다. 1행에서부터 시작하여 3행까지 거쳐 온 우리는 이제 너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나의 삶이라는 영화 속에서 함께 해온 모든 컷에 영영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순간들을 담아 놓은 사람이 바로 너다.
5행은 바로 그런 심정을 심화시킨다. 나는 줄에 매달린 방울이고, 그 방울을 흔드는 설렁줄을 쥐고 있는 사람은 너다. 헤어져서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순간마저도 너는 나를 쥐고 흔든다. 네가 흔드는 부분에서 짧게 시작된 파동은 나에게 이르러 거대한 해일이 되고 나는 하염없이 흔들린다. 이 짧은 순간은 무한한 시간처럼 느껴지고 나는 계속 흔들린다, 수시로 너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