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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nter flush Sep 07. 2021

키냐르의 '정원'과 히로카즈의 '원더풀 라이프'

삶과 죽음의 공존

'죽음'은 삶에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단어이면서도 늘 잊게 되는 단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역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혼극招魂劇의 형태인, 파스칼 키냐르의 희곡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를 읽으며, 이해하기 힘겨운 그의 글이  전하는 메시지를 이성이 아닌 감각으로 받아들여 봅니다. 音이 흐르듯 글이 흐르는 문장 사이 자연의 소리가 새어 나옵니다.  새소리와 첼로의 저음, 무대의 조도를 마음껏 상상하며 글을 읽어 내려갑니다. 저자가 언급한 덴마크의 화가 빌헬름 함메르쇠이의 작품 속 공간처럼 무대를 꾸며 봅니다. 제게  연출을 맡긴다면 그런 공간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때문이지요.

희곡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설파하셨던 인문학자 김경집 선생님의 지난 강의가 떠오르네요. 오감을 통해 상상 속에서 펼쳐지는 무대에 조명과 음악, 대사와 동작 등 모든 것을 조합하여 읽다 보면 작품은 입체적으로 다가옵니다.

난해하게 여겨지던 부분들이 다시 읽다 보니 새로이 다가오고, 생경한 표현과 마주하며 말로 풀어 설명하기 힘든 이유를 대보라면 '삶'자체를 설명하기 힘든 이유를 변명처럼 대보고 싶기도 하고, 또 말로써 그 느낌을 변색시키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공존시키고 분리될 수 없음을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는 시미언 사제의 인생에서 반박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무엇'이 마음에 파동을 일으키네요.

책을 덮으며 방황하는 마음을 잠재우려 영화 한 편을 골랐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입니다.

삶과 죽음, 그 사이 7일간 머무는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내 인생에서 머물고 싶은 단 한순간을 기억하기 위한 사흘.

그 사흘 동안 한 生을 더듬어 봅니다. 

그 하나의 기억을 안고 나머지 모든 기억은 사라집니다.

그 기억과 함께  저세상으로 영원히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의 기억을 고르지 못하거나 혹은 선택을 원치 않는 이들은 떠나가지 못하고 그곳에 남아 저세상으로 건너가는 이들의 기억을 돕고 그 추억을 영상으로 만들어 보내드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제 인생을 돌아보게 되네요.

선택을 못하는 것이 아닌, 하지 않는 이들의 마음이 헤아려지는 이유는 삶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요?

삶도 죽음도 아닌 공간에서 방황하는 남겨진 사람들.. 

삶의 숙제를 마치지 못한 사람들처럼, 

힘겨운 책임을 스스로에게 지으며 사람들의 추억을 그러모으는 사람들.

이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마음에 담고 저세상으로 떠나는 모치즈키의 시선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삶'도 '죽음'도 홀로 완성할 순 없지만 그 길만은 홀로 갈 수밖에 없다는 역설을 받아들이며 고통의 마음과 고통이 사라진 자리의 고즈넉함을 동시에 마주합니다.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삶'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죽음 이후 마음에 남는 행복한 기억들은 작고 소소한 것들입니다.

작고 소소한 것들이 마음에 던지는 파문을 외면한 채 낯선 곳에서 헤매고 방황하는 삶을 매 순간 만나게 됩니다. '어리석음'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생겨나는가 봅니다. 


시미언의 아내 에바의 정원과 사제의 정원, 그리고 딸 로즈먼드의 정원은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세계입니다.

하나의 정원은 세 개의 세상이고, 그  세 개의 세상을 정원은 또다시 하나로 이어주네요.


'삶'이 시작이고, '죽음'이 또 다른 시작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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