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 스무디와 단호박빵
지난 겨울 독감을 심하게 앓고 난 후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 전까지는 주부라는 무게가 그저 의무와 책임으로 짊어지고 끌고 가야하는 짐처럼 느껴졌다면, 아파서 꼼짝을 못하던 몇 주간 건강의 소중함이 얼마나 빛이나는 것인지,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를 깨닫게 되면서는 더이상 그 무게가 그리 무겁지 않습니다.
사실 집안일 이라는게 매일 해도 티가 나지 않으며 하루만 걸러도 금새 그 자리가 드러나는 법이지요. 그래서 주부의 마음은 늘 일상의 무게에 짓눌립니다.
그런데 품은 마음에 봄기운이 스며들듯 가벼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안일을 할 수 있다는 데 대한 감사함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지요.
네.. 예전에도 집안일은 늘 저의 몫이었고, 열심히 하지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마음가짐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이지요.
집안을 정리하고 식구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이 행복한 시간으로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면서 하루에도 수십번 '감사'라는 단어가 마음속에 울립니다.
찬물에 야채와 과일을 씻으며 손이 시려워 얼굴을 찡그리던 제가 그 녀석들이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드니 손이 시려운것도 대수가 아닙니다.
늘 미루던 다용도실 청소를 할 힘이 생겼다는게 감사합니다.
참.. 고작 독감 앓고 나서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큰병이라도 앓고나면 성인이 되겠네요.^^
하지만 지난 겨울 제게 찾아온 독감은 죽음을 떠올릴 정도로 무섭게 다가왔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조금도 나아지지 않던 보름이상의 기억.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은 소소한 일상이 안겨주는 행복의 큰 자리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늘 하던 일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먼지를 쓸어내고, 윤기나게 닦고, 채소를 다듬고, 식구들을 위해 밥을 짓는다는것.
이러한 일상이 얼마나 큰 행복을 만들어 내는 일인가를 왜 깨닫지 못하고 의무감에 해 왔을까.. 이 일은 제게 주어진 권리였습니다. 할 수 있는 권리 말이지요.
요즘은 읽고 싶은 책을 구입하거나 빌릴때 꼭 살림과 관련된 책을 하나 끼워 넣습니다. '음식을 처방해 드립니다' 네.. 처방해준 대로 아침마다 저희집 믹서기는 신나게 그린스무디를 만들고 있습니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아이들을 데려와 레몬도 껍질째 갈아주니 새콤한 향긋함이 입안에 가득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에베레스트 스무디' 입니다. 왜인지는 책을 읽어보세요~^^
단호박을 박스째 구입해 먹고 있습니다.
늘 수프만 만들어 먹다가 뭔가 새로운 방법이 없을까 하던차에 알게된 레시피로 단호박 빵을 만들어 봅니다.
이건 밀가루도 버터도 들어가지 않네요.
단호박빵의 핵심은 계란흰자를 마구 쳐서 머랭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동 거품기가 없다면 팔뚝이 좀 아프겠지요??
모양은 좀 투박해도 맛있습니다.
빵을 만들어준다고 부엌에서 뚝딱거리니 식구들이 오랜만에 빵구워 먹을 생각에 춤을추며 좋아합니다.(저희집에 어린이 없습니다. 큰 어른 둘이 이리도 좋아하네요.) 이렇게 좋아하는데 그동안 왜 빵은 사다만 주었을까요..
얼마전 보았던 영화, '인생 후르츠'에서 여든이 넘으신 히데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름답게 나이든다는것, 자신이 하는 일에서 감사함을 느낄줄 안다는것, 그 사랑이 가족들한테 행복을 안겨 준다는것..
몸이, 마음이 지칠땐 이 사진을 꺼내 보렵니다.
히데코 할머니의 모습을 맘에 담으며 그렇게 나이들고 싶네요..
사랑스런 단어입니다.
'주부'라는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