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지은 리듬
소설은 생의 시작점과 마무리만을 묘사하고 있다. 치열했을 삶의 과정은 여백으로 밀어놓은 채 시작과 끝의 의식만을 담담하게 그린다. 할아버지 이름을 물려받은 올라이의 아들 요한네스. 일곱 아이의 아버지며 사별한 아내 에르나의 남편인 어부 요한네스의 살아온 삶의 흔적은 오롯이 독자들의 몫이다. 소설의 줄거리나 내용보다는 글 안에 녹아든 요한네스의 인생을 따라가며 삶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고 명상하듯 찬찬히 숨을 고르고 낭독하며 읽는 것이 작가의 의도를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 건 책을 덮고 난 뒤 길게 이어지는 여운이 알려준 사실이다.
음악가의 길을 걷다 작가가 된 욘 포세는 글을 마치 음표처럼 취급해 작곡하듯 글을 짓는다. 마침표가 없는 문장. 부재한 마침표는 글에 음악적 리듬을 부여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소리 내어 읽어야 제맛이다. 눈으로 보는 문장과 낭독한 문장은 확연히 달랐다. 마침표가 없는 문장은 자칫 숨을 가쁘게 만들고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당황스럽게 만들었지만 쉼 없이 이어지는 쉼표의 의미를 새기며 읽다 보면 마치 물결이 일렁이듯 문장의 리듬이 느껴지고, 그 리듬은 마치 박자가 정해진 악보처럼 글로 지은 한 편의 푸가를 연상시킨다. 숨을 고르게 만드는 쉼표는 생각의 여백으로, 침묵으로 안내한다. 이는 소설이지만 마치 명상하는 기분을 자아내고, 간절히 바라는 기도문 같기도, 무대에서 상연하는 희곡처럼 읽히기도 한다. 보통 사람 요한네스의 잔잔한 일상 안에 삶과 죽음의 거대한 주제를 펼쳐놓고 독자에게 그 삶의 파도에 동참하길 권한다. 어떤 부분을 펼쳐 읽어도, 시간의 순서가 바뀌어도, 문제 될 건 없다. 만나는 문장 속에 머물다 사유의 바다에 유영하듯 노닐다 보면 멀어지는 현실이 소설을 읽고 있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이 소설과 잘 어울리는 음악을 하나 만났다. 미니멀리즘 음악가인 아르보 패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은 마치 이 소설의 다른 얼굴처럼 느껴질 정도로 닮아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단순한 선율의 반복은 잔잔하게 일렁이는 파동에 몸을 싣고 빛을 향해 나아가는 요한네스의 시선을 연상시킨다. 이 음악을 들으며 글을 썼을까 싶을 정도로 이어지는 선율은 어부 요한네스의 삶을 이야기한다. 영혼의 친구 페트르의 안내로 서쪽을 향해 가는 요한네스의 뒷모습이 아련하게 그려진다.
소설의 여운을 오래 남기려면 음악과 함께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책 <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를 권한다. 바람처럼 스쳐가는 삶의 흔적들이 생의 그리움으로 다정함으로 각인되어 은은하게 펼쳐진다.
마치 요한네스가 가장 사랑한 막내딸 싱네의 시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