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a 봄,마중

나만의 티 블랜딩

by winter flush

다산과 추사의 유배생활처럼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감히 말할 순 없지만 내게도 마음이 고통으로 휩싸여 지내기 힘든 시간이 있었다. 사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쉽지 않다고 느껴지고, 그 힘든 시간들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거친 시간 속에 조금씩 단단해져 가는 나를 발견한다.

참고 견디는 삶에 사람들은 인정과 존중을 함께 주지 않고, 거친 세상에 부딪혀 갑옷을 꺼내 입게 만든다. 가장 소중한 건 '내 안의 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바보같이 살았던 시간들이 아팠다.


어느 날, 예전 홍차 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단체 문자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의 유명한 티 마스터 분들을 모시고 일반인들을 상대로 첫 '티 블랜딩 대회'가 개최되니 많은 분들의 참여를 바란다는 소식이었다. 평소 같으면 큰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문자를 받을 즈음의 나는 마음에 큰 상심이 있었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터라 그 문자는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뭔가에 도전하고 새로운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젊은 시절에나 하던 낯선 일처럼 다가왔지만 용기를 내보고 싶었다. 한없이 작아진 내면의 나를 어떻게 해서든 끄집어 내보고 싶은 부추김처럼, 그렇게 시작된 티 블랜딩 대회의 준비로 마음이 바빠졌다. 어떤 구상으로, 어떤 주제로 블랜딩을 해 볼까? 원하는 차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차의 조합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원하는 차를 구하는 것도, 차의 가격이 저렴하지 않은 것도, 그 과정 하나하나가 맘처럼 쉽지는 않았다.

국내 생산차를 60% 이상 사용하는 것이 대회의 조건이었다.

녹차로 베이스를 정하니 봄이 떠올랐다. 차의 컨셉은 '봄'이다. 얼었던 눈이 녹으면서 봄기운이 살랑이며 올라오는 기운을 표현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차의 조합이 하나 둘 떠올랐다. 그동안 다양한 차를 마셔 온 경험은 이런 때 큰 도움이 되었으니 원하는 블랜딩을 조합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주최 측에서 제시한 조건에 맞게 차를 준비하고 출품을 하고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기다리는 시간은 설레기까지 했다. 차 엑스포가 열리는 중에 시상이 있었는데 대회가 가까워져 와도 기다리는 소식은 오지 않아 기대를 접어야겠다는 아쉬움의 마음이 진해질 즈음 낯선 번호의 전화가 울렸다. 수상을 하게 되었으니 참석을 해 달라는 당부와 어떤 상을 받는지는 수상 당일에 확인할 수 있다는 기운 찬 목소리의 전화 한 통은 화사한 봄빛처럼 집안에 온기를 실어다 주었다.

엑스포가 열리는 광주의 '김대중 컨벤션 센터'를 가기 위해 고속버스 예매를 하고 나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뭔가를 준비하고 집중을 하고 결실을 얻는다는 것,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뿌듯함이다.

당일 이른 아침, 남편과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컨벤션 센터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곳저곳에서 따스한 차향이 피어오르고, 차를 시음하는 사람들의 온기 가득한 미소가 여기저기서 배어 나왔다. 수상식이 거행되는 자리를 찾아가 보니 외국의 티 마스터 분들의 특강이 진행되고 있었다. 호주, 터키, 일본, 싱가포르... 각국의 티 마스터 들을 한 자리에서 뵙는 행운도 덤으로 얻게 되고, 강의가 마무리되면서 곧이어 수상식이 거행되었다.

....(중략)

상을 받아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희미한 나이. 내 이름으로 작은 뭔가를 해냈다는 기쁨은 그간의 마음고생에 작은 보상을 받은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나만의 것이 된 '봄,마중'. 이 차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차다. 내 인생의 봄을 마중하는 의미도 보태어졌을까? 뭔가를 시작하라고 내게 용기를 밀어 넣어 준 큰 선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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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투명하게 맑은 어느 날, '봄,마중'을 들고 수종사로 향했다. 삼정헌 맑은 물로 차를 우려 보고 싶었다. 이르게 서둘러 가지 않으면 사람들로 북적일 그곳이라 사람들의 발길이 닿기 전에 도착하려 서두르니 내가 첫 번째다. 큰 창으로 두물머리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아침의 안개가 엷게 퍼져있다. 굽이치며 비스듬히 흐르는 산세는 푸른 안개에 감춰져 흐리게 보이는 먼 산과 검푸르게 다가오는 가까운 산의 굴곡이 사이좋게 포개져있다. 늘 앉던 곳에 자리를 잡고 뜨거운 물로 다구들을 예열하니 이 곳이 내 집 인양 마음이 차분해진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찻잎을 꺼내 파릇한 봄의 기운을 열어본다. 뜨거운 물에서는 제대로의 맛을 낼 수 없는 녀석이 들어있으니 물을 숙우에 한 김 두 김 식힌다. 숙우에서 찰랑이는 물은 저 아래 고요히 흐르는 강물과도 닮은 듯 말없이 속상이고, 우린 수색은 봄의 빛을 모두 모아 담아놓은 듯 노란빛을 띠고 차분히 앉아있다.


이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친다. 산다는 것,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산다는 것. 사는 게 어렵고 힘들다는 건 결국 사람들과의 관계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고, 지혜롭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내면의 내게 되묻게 된다.

창 아래 흐르는 두물머리 강물은 세월을 거스르지 않고 저렇게 두 줄기의 강물이 만나 하나로 흐르고, 발아래 푸르게 솟아있는 우뚝한 저 나무들은 세월 속에 푸르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서 있으니, 주어진 생을 열심히 저어가며 흐르는 자연을 보며 마음에 새기듯 인생을 배운다.


이렇게 또 기다리는 봄은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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