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a 신농 황제

마리아쥬 프레르 Empereur Chen-Nung

by winter flush

해가 저물 시간은 조금 더 남았는데 하늘은 어둡게 내려앉았다. 두꺼운 구름층 사이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고 시야는 뿌옇게 흐리다. 마음마저 어둡게 가라앉기 전에 차를 한 잔 우려야 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 흐린 날 손이 가는 차는 정해져 잇다. 날씨에 따라 마셔야 하는 차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손과 마음은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레 차를 고르고 내 앞에 슬쩍 가져다 놓는다. 왠지 이런 날은 파릇한 녹차에 손이 가지 않고, 청향 가득한 우롱차도 내키질 않는다. 스모키 한 훈연 향이 맴도는 묵직한 차 한 잔이 끌리고..


프랑스의 마리아쥬 프레르는 역사가 오랜 홍차 전문점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작은 잔에 진한 에스프레소를 즐기지만 언젠가부터 홍차에도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해 이젠 제법 다양한 홍차 매장이 여기저기 생겨나고 있다. 그래도 역사가 제일 깊은 곳은 단연코 마리아쥬 프레르다. 영국보다도 앞서 홍차를 마시기 시작한 프랑스지만 영국에서만큼 홍차의 인기는 늘지 않았고, 차는 나이 든 부인네 들이나 마시는 구식 음료로 여겨져 사람들의 시선 밖에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마리아쥬 프레르는 질 좋은 찻잎을 공급받기 위해 100여 년간 숨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그 빛은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서서히 발하기 시작했다. 태국 출신의 차 마니아 키티 차 상마니에 의해 새롭게 운영이 되면서 마리아쥬 프레르는 화려한 발돋움을 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가향차 블랜딩에 집중하게 되었다.

7.jpg

그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은 적중하고 있으며 특히 일본인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품질이 좋은 찻잎에 고급스런 향을 가하니 콧대 높은 가격도 뭐라 할 말이 없다.


마리아쥬에서 반가운 차를 만났다. 바로 차의 기원 '신농'이다. 신농 황제를 마리아쥬에서는 어떻게 해석을 했을까? 신농 황제의 이름을 걸고 어떤 블랜딩을 했을까? 차의 블랜딩은 내게 끊임없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릴 적 추억 하나, 크리스마스 즈음이 되면 커다란 네모 상자에 과자가 가득 담긴 종합 선물 세트가 다양한 사이즈로 가게의 진열장을 채우며 어린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곤 했다. 엄마를 졸라 커다란 녀석으로 골라 하나 집어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찌나 신이 나던지. 그 안에 뭐가 들었을지 궁금해하며 부푼 마음으로 상자를 풀어보던 그때의 추억은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을 따뜻하게 지피는 작은 기억의 불씨다. 먹고 싶은 걸 골라서 사는 게 더 좋지,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는 종합 선물 세트가 뭐가 좋으냐고 했지만 난 그게 그렇게 좋았다. 누군가 어떤 조합으로 과자 한 상자를 완성해서 예쁘게 포장해 놓은 것. 그 안에는 뭐가 들었을지 모르지만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 어린 마음을 콩닥거리게 하던 네모난 상자.

내게 차의 블랜딩은 어릴 적 그 마음처럼 늘 두근거리게 만든다. 새로운 블랜딩 차를 만날 때면 안에 든 찻잎이 어떤 향을 품고 어떤 맛과 수색을 내어줄지 무척이나 기대가 된다. 그 마음은 품 안에 가득 안고 어떤 과자가 들었을까 하고 궁금해하던 내 어릴 적 추억의 셀렘과 닮았다.


처음 이 세상에 차를 소개해 준 신농씨, 어떤 향과 맛을 품고 여기까지 오셨나요? 처음 마주하는 향을 기대하며 깔끔한 디자인의 검은 차 봉투를 조심 열어보니 강한 훈연 향이 훅 밀려들고 내 눈은 금세 둥그레진다. 예상치 못한 습격이다. 차의 향을 맡으며 습격이라는 표현이 왜 나왔는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면 이 차의 향을 맡아보시라. 누구라도 이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습격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만큼 이 차의 향은 강하게 밀려들어온다. 까슬거리듯 진하게 퍼지는 향은 흔히 상상하는 친숙한 홍차의 향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다. 차라고 하기보다는 약에 가까운, 차와 약의 그 모호한 정체성의 기로에서 잠시 눈빛이 흔들린다. 그 충격에서 살짝 빠져나오니 신농이라는 이름을 걸고 차를 블랜딩 하며 한참 고민에 빠졌었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상상이 되었다. 차의 기원 신농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오래 고민하며 고단했을 그 시간이 만들어낸 이 차는 향으로도 눈치챌 수 있듯 랍상소우총을 닮았다. 홍차의 원조인 정산소종이 되고 싶은 랍상소우총. 그 사연 속으로 빠지다 보면 이 차의 강한 향기가 묵직한 역사의 깊이로 다가오니 차를 마시는 즐거움은 내게 이런 것이다.

11.jpg

물이 끓는 동안 찻잎으로 조금 더 살펴본다. 검은 찻잎은 여전히 진한 향을 내뿜으며 강한 모습으로 앉아있고,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부으니 머무르던 향이 주위로 빠르게 퍼진다. 사방을 휘저으며 맴돌던 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차분히 가라앉고, 이내 맑은 갈색의 수색으로 우러나 단정하게 앉아 있다. 처음의 강한 인상은 서서히 잦아들고 그윽한 늦가을의 향을 내어주며 여린 은은함 마저 보태준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한 모금 넘기니 이번엔 그 맛에 두 눈이 둥그레졌다. 흐리게 쳐진 하늘에 멋지게 어울리는 맛이다. 강한 첫인상은 먼 시간을 지나온 듯 아득하게 풀어져 희미한 기억만을 새겨주고 바랜 향을 대신해 찻잔에 남겨진 은은함은 따스한 온기로 남아 마음의 온도를 지켜준다. 티팟 한가득 우린 차를 금세 비워 버렸다. 가라앉으려던 마음은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슬슬 기운을 차리고 올라온다.


한 잔의 차가 주는 위안은 좋은 사람의 따스한 위로 한 마디처럼 다정하다.

차 한 잔에 하루를 시작할 힘을 얻고, 또 한 잔에 지친 하루를 기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