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를 보면 어릴 적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설레임으로, 그리움으로 담겨 있다. 예전 보았던 그 영화를 나이 들어 다시 꺼내 보니 또 다른 설레임이 다가온다. 예전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섬세한 감정까지 더해져서..
사랑이란 감정은 이렇듯 잔잔하던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일상에 묻혀 잠시 잊고 지냈던 그 감정이 언젠가부터 내 마음에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거실의 큰 창을 향해 걸어가 습관적으로 하늘을 살핀다. 하늘이 내어주는 표정을 보며 채워나갈 하루를 마음속으로 그려본다. 그리고는 차를 고른다. 내 마음에 들어온 차와 찻잔을 고르며 잠시 지나온 일상들과 마주한다. 나를 위한 한 잔의 차, 그리고 짧은 생각들... 행복은 이 순간 소리 없이 스며든다.
홍차는 내게 이렇게 조용히 다가왔다. 따스한 온기를 품고 가벼운 향을 내어주며 고운 수색으로 얌전히 앉아서는 작은 손짓을 한다. 그 거부할 수 없는 몸짓에 나는 달뜬 마음으로 조용히 숨을 고른다.
홍차는 내게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내가 차를 고르고 우리는 시간은 '내 안의 나'와 만나는 시간이다. 그동안 별 관심 기울이지 않았던 내 안의 내게 차분한 찻자리를 마련하여 조용한 초대를 한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스한 홍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으면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순간 지친 일상의 고단함이 밀려오기라도 하면 잠시 그 일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이 순간만큼은 나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차분한 이 시간, 지나온 시간들을 추억하다 보면 스쳐간 인연들이 문득 떠오르기도 하고, 책장에 꽂힌 두툼한 책에 손이 가기도 한다. 집어 든 책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무게가 켜켜이 쌓여있고, 난 따스한 차 한 잔과 함께 그들을 만나고 그 삶을 느끼고 그 무게에 나를 싣는다. 홍차는 때로 현실 속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도 준다. 홍차가 아니었음 만나지 못했을 그런 인연들을 말이다.
차의 향기만큼이나 다양한 향기를 품은 사람들이 내게 다가왔다. 차를 닮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건네 온다. 은은한 향기를 품고서 따스한 온기를 유지하는 고운 수색의 홍차처럼 그런 인연들이 내 주위를 따스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홍차에 대한 나의 관심은 삶마저도 사랑스럽게 만든다.
사람만큼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길에 피어있는 한 송이 꽃 보다도, 첫눈의 보송한 눈송이 보다도,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짙푸른 기운 보다도 사람이 아름답다.
때로는 사람 때문에 아프고 상처 받고 힘들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