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죽음'이란 단어는 일상에서 늘 대하게 되지만 그 무게감은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죽은 자의 몸이 자신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법의학자인 저자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우리는 하루하루를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의 울림은 그저 울림일 뿐이라는 생각도 들지요.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나를 보려면 하루를 어떻게 살고 있나를 보라던 어떤 학자의 말이 스칩니다.
죽음과 삶은 그야말로 동전의 앞뒷면처럼 늘 붙어 다니는 샴쌍둥이와도 같게 느껴지네요.
이 책으로 독서토론을 하자고 누군가 제안했을 때 제목이 주는 거부감이 먼저 올라온 것도 사실입니다.
'시체'라는 단어가 주는 이질감이 먼저 마음에 닿았던 것 같습니다.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죽음과 관계된 여러 가지 것들을 애써 외면하며 살고 싶은 이유는 아마도 '두려움' 때문이겠지요.
사후 세계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몸속 어딘가 똬리를 틀고 자리 잡고 있는가 봅니다.
평소의 책 모임보다 훨씬 더 시간이 오버되었는데도 멤버 중 누구 하나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잠시 정지된 시간속을 여행하고 온것 같습니다.
2045년이 되면 '영생'할 수 있는 삶이 펼쳐진다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종결짓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 세상이 어쩌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가능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생각해보면 그런 삶이 펼쳐진다는 건 참으로 비극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연의 흐름을 막고 거스르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해가 뜨면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고 싶은 인간의 욕구는 어쩌면 삶과 죽음의 축소판일지도 모릅니다. 일상 속 자연의 흐름에서 삶 그리고 죽음의 코드를 읽어냅니다.
영생에 대한 욕구는 두려움을 직시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회피일까요?
케보키언이라는 의사가 '타나 트론'이라는 기계를 고안했습니다.(이 기계로 8년간 수형생활을 하게 되었지만요.)
자살기계라 불리는 이것은 수액을 맞다 보면 수면제가 나오고, 잠이 들면 독약이 나와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만듭니다.
꽤 괜찮은 죽음 방법으로 여겨졌지요. 잠들듯이 죽을 수 있다니요..
영생이 가능한 시대가 온다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도 보장이 되고 그 선택 방법도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합법적인 자살이 보장되는 시대.. 저의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요.
노년기가 길어지는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대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무척 어렵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말도 건네지 못한 채 호흡기와 주렁주렁 달린 고무호스에 의지한 채 의식을 잃어가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그레이 존 때문에 자신이 죽는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원치않는 삶의 연장으로 의미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삶의 과정 만큼이나 죽는 과정 또한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또렷한 의식으로 진행해 나갈 수 있게 말입니다.
죽음을 통해 '삶'을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보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이 곧 좋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