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에도 계절이 있다

지난 8개월의 여정

by 겨울밤

슬픔은 마치 파도와 같다고들 한다. 잦아들었다가도 다시 찾아오고, 어느 날은 비교적 잔잔하지만 어느 날은 집채만한 파도가 나를 집어삼키는 듯 고통스럽기도 하다는 측면에서. 돌이켜보면 나의 애도 과정도 그랬다. 감정이 조금 괜찮아지나 싶다가도 다시 곤두박질 치거나, 바닥을 찍고 나면 서서히 나아졌다. 그리고 파도의 진폭에 따라 마음 상태나 애도 방식에도 변화가 생기곤 했다. 내 경우엔 그게 딱 3개월 주기였던 것 같다. 마치 1년 안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 애도에도 분기가, 계절이 있나보다.


12월에 동생을 잃고 첫 3개월은 충격 속에 있었다. 현실이 거짓말 같았고 아직 뇌가 현실을 인지하기 전이기에 슬픔보다는 두려움이 컸다. 밤에 혼자 있기가 무서웠다. 불을 하나라도 켜놓지 못하면, 누군가 옆에서 함께 자 주지 않으면 잠들 수 없었다. 작은 소리에도 심장이 쿵 내려앉을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PTSD의 일반적인 증상이라고) 1월에 사망신고를 하고 나서는 현실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지만 마음 깊이 와 닿지는 않았다. 그저 동생이 어딘가로 멀리 긴 여행을 떠나 잠시 집을 비운 느낌이었다. 아빠가 유품이라곤 거의 남기지 않고 동생 물건을 모두 비운 상태기는 했지만. 그리고 동생이 떠난 이유를 알고 싶어서, 이런 상실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제 알기 위해 책으로 파고들었다. 머릿속의 질문이 너무나 강력했기에 오히려 집중력을 발휘하여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게 기억에 남았느냐는 별개지만.


3월이 되자 묵직한 슬픔이 비로소 나를 강타했다. 매일 밤 친구를 불러 같이 자 달라고 할 수 없기에 혼자 자기 시작했고, 잠깐 만나던 사람과도 헤어져 의지할 구석이라곤 없었다. 밤이 되면 더 무겁고 생생하게 내려앉는 슬픔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침대에 누워있으면 몇 톤은 되는 묵직한 돌이 내 몸 전체를 내리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심장이 어느 날은 납덩이처럼 묵직하고, 어느 날은 아프게 쥐어짜는 듯 하고, 또 어떤 날은 타는 듯 했다. 슬픔은 이렇게나 힘이 세고, 우울에 사로잡히면 스스로 목숨을 앗아가는 선택쯤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그걸 나에게 알려주고 싶었나, 하는 생각도 함께. 나는 그런 선택을 하고 싶은 마음도, 그럴 이유도 없다고 호언장담을 하며 아빠를 안심시켰는데. 앞일을 모르는 인간의 오만이었다.


4월은 동생 생일이 있는 달이었다. 그 날이 가까워오자 비로소 사별이 완벽한 현실이 되었다. 어딘가로 잠시 여행을 떠난 거라면, 자기 생일엔 돌아올 것이 아닌가. 우리 가족은 항상 케이크를 사서 초를 꽂고 작은 생일파티를 열곤 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초에 불을 붙여 노래를 해야만 생일이었다. 그걸 더는 할 수 없다는 게, 기뻐야 할 날 더 이상 기쁠 수 없다는 생각이 슬픔의 쓰나미를 불러왔다. 동생의 부재를 견딜 수 없어 동생의 오른쪽 귀 아래 있던 타투를 왼쪽 쇄골 아래 새겼다. 동생의 일부라도 몸에 지니고 싶다는 생각에.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 푸른 파도를 오른쪽 어깨에 새겼다. 컬러 타투인데다 견갑골 바로 위에 받아 뼈를 두드리는 듯한 바늘이 꽤 아팠는데, 신체적 고통이 마음의 통증을 일시적으로 덮는 듯 하여 차라리 낫더라. 거기서 멈추려 했는데 내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내가 타투를 새긴 곳들은 내 눈으로 쉽게 들여다 볼 수 없는 자리였다. 특히 살아갈 에너지를 얻으려고 받은 파도 타투는 시야의 사각지대에 있어 거울로 보지 않으면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잘 보이는 오른쪽 전완 안쪽에 타투를 하나 더 새겼다. 고생대 후기부터 지구상에 존재하며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은행. 그 이파리를 새겼다. 나도 세상을 저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마다 마음을 다잡으려고. 그렇게 3주만에 세 개의 타투를 몸에 남기며 힘든 4월을 넘겼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5월엔 무급휴가를 써서 2주간 발리 여행을 다녀왔다. 삶이 무너진 애도의 현장에서 떠날 필요가 있었다. 장기간 이어진 슬픔으로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것 같은 상태였으며, 멀쩡하지 않은 데 멀쩡한 척 일하는 것도, 이제는 내가 부모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부모님이 의지할 수 있도록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는 K 장녀다운 생각까지. 무너진 가운데 온갖 책임을 떠안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날 옥죄는 것 같아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갑갑했다. 끔찍한 현실로부터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마냥 자유롭고 행복하지만은 않은 여행이었다. 하필이면 내 여행 루트 중 문명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었던 길리 트라왕안에서 발리 밸리를 앓아 죽다 살아날 뻔하기도 하고, 동생은 여전히 꿈에 등장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해 주었으며, 요가를 하다가 울음이 터져 요가 선생님의 품 안에서 오열하기도 했다. 그래도 길리 바다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이, 발리 사람들의 온화한 미소가 위안이 되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집과 거리를 쓸고 닦으며 일상을 정성스레 대하는 태도가, 매일 차낭사리를 공양하며 주어진 삶에 감사하는 마음가짐이 가르침이 되었다.


6월엔 발리에서 충전한 에너지를 동력삼아 다시 삶에 뛰어들었다.

매주 여행을 떠날 수는 없고, 새로운 배움만이 나를 살게 할 거라는 생각에 탱고를 배워보기로 했다. (원래는 주짓수를 배우고자 했지만 발리에서 얻은 평화로 무술에서 춤으로 방향을 틀었다.) 스스로를 몸치라고 단정짓고 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던 나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다행히 탱고는 상체는 아브라소로 고정한 채 하체 위주로 추는 춤이었고, 다른 라틴 댄스에 비해 템포가 그리 빠르지 않았다. 열정과 함께 슬픔을 담고 있는 춤이라 더욱 나와 결이 맞는 듯했다. 생면부지인 타인의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안는 게 영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조금씩 익숙해졌다. 손 끝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마음이 유난히 힘든 날 위로가 되기도 했다. 여행이 가져다준 일시적 평화가 흐려지며 슬픔이 엄습할 때, 탱고를 추고 나면 어지럽고 아픈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달리기도 다시 시작했다. 그간 달리기보다는 근력운동에 조금 더 꾸준했던 나지만, 삶의 생기가 흐려질 때 러닝만큼 살아있다는 감각을 강력하게 불러일으키는 게 없더라. 애도 과정에서 체력소모가 워낙 컸기에 페이스도 거리도 이전만 못했지만. 러닝 크루 사람들과 함께 뛸 때 얻을 수 있는 느슨한 세상과의 연결감도 탱고의 아브라소 같은 소소한 위로였다. 풀 마라톤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목표도 생겼다. 풀 마라톤은 인생의 은유 같다던 누군가의 한 마디가 불씨가 되었고, 그리고 지금은 내가 절대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42.195km 완주를 마친다면 삶이 나에게 어떤 펀치를 날리더라도 버틸 수 있는 맷집이 생길 것 같았다. 애도 과정에서 미래 계획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처음으로 어떤 목표와 계획을 세웠다. 일단 최장 러닝 거리를 서서히 늘려 올 가을엔 하프 마라톤에 도전하고, 내년 가을엔 풀 마라톤에 도전하기로. 목표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몸도 마음도 튼튼해질테니.


그리고 8월이 왔다. 달리기와 탱고로 많이 회복했다고 느꼈었는데 다시 무너져 내렸다. 슬픔의 도화선은 네일샵 원장님이 물어온 질문, "혹시 동생 있지 않으세요?"였지만 ―동생이 다니던 네일샵이라 동생과 이름이 비슷한 내가 언니라고 짐작하신 듯 했다― 걷잡을 수 없게 불길이 커진 이유는 작년의 기억 때문이었다. 작년 8월에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고, 바로 옆 건물로 이사하는 거라 이사업체 없이 둘이 정말 고생하며 이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실 창 밖으론 벚나무 두 그루가 보이고, 이전보다 조금 더 넓고 아늑한 공간이라 둘이 꽤 행복했었더랬다. 그 기억을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후덥지근한 공기가, 쨍한 햇살과 창 밖에 보이는 무성한 벚나무가 자동으로 행복했던 기억을 소환했다. 이 집에서 오래오래 잘 지낼거라고 생각했는데, 겨우 1년 사이에 180도 변해버린 현실을 (또 다시) 인정하기 어려웠다. 이번엔 과거와 다르게 인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머리론 알지만 그러기 어려웠다는 사실이 달랐을 뿐. 이전과 달리 자기혐오가 비탄에 뒤섞여 더욱 힘겹기도 했다. 내가 그 때 동생을 붙잡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다시 찾아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처음으로 다시 돌아간 듯 슬퍼했다. 웬만하면 직장에선 슬픔을 티 내지 않는데 차오른 울음을 삼키지 못하고 목놓아 울기도 했다.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어 반차와 연차를 쓰고 동생이 없는 집에 돌아가기 싫어서 잠옷도 없이 숙소를 잡거나 매 주말 여행을 떠났다. 누가 본다면 여름을 맞아 신나게 놀러다니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저 현실이 너무 버거워 도망치고 있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여행은 잠시 도피일 뿐, 새로운 애도의 방식이 필요했다. 매일 밤 혼자 침대에서 오열하는 거 말고. 안전하게 감정을 흘려보낼 수 있는 다른 방법 말이다. 그간 했던 활동들을 돌이켜 보았다. 달리기는 삶을 심폐소생 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지만, 감정을 섬세하게 다루기엔 적합치 않았다. 감정을 흘려보내는 데는 달리기보다는 탱고가 더 나았다. 달리기와는 달리 스텝에 온 정신을 집중하느라 몰입이 깨질 새가 없었기도 하지만 슬픔이 살짝 녹아있는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그 자체가 감정이 나가는 통로가 되는 것 같았다. 춤이나 음악, 그림 같은 예술이 글보다는 덜 아프게, 그리고 안전하게 감정을 흘려보낼 출구가 될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 만이라도.


그래서 9월을 앞둔 지금은 예술에 기대려고 한다. 드로잉 인강을 시작하고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다. 물론 감정을 어떻게 종이에 그림으로 꺼내보일 수 있을 지 아직은 어렵다. 그래도 선을 하나하나 긋다보면 거기에 감정이 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뭐든 그려 보려고 한다. 감정을 싣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림을 그리는 순간의 몰입이 슬픔에 휴식을 주지 않을까. 음악은 오히려 쉽다. 이미 작곡된 곡들 안에서 내 감정과 공명하는 곡들을 고르기만 하면 되니까. 20년 만에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는 게 어색하고 건반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지만, 신기하게도 손가락이 건반을 기억하고 찾아가는 느낌이다. 연주해보고 싶은 곡은 많다. 나는 기타, 동생은 우쿨렐레로 합주했던 <언제나 몇번이라도>, 윌리엄 볼컴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추모하며 작곡한 <우아한 유령>, 감정을 흘려보내려 들었던 이루마의 <River flows in you>와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 아련함, 슬픔이 묻어있는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 첫 수업이 하필 동생과 합주했던, 들으면 가장 아픈 <언제나 몇번이라도>라 연습실에서 혼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연주했다. 그래도 눈물과 함께 피아노 건반 소리로 감정이 빠져나가는 듯 해서, 그냥 우는 것보단 덜 아프더라.


신기하게도 감정이 흘러나갈 다른 통로를 마련하기 시작하자 지금처럼 글을 쓸 용기가 생겼다. 한 줄씩 겨우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역시 기우였다. 이렇게 글을 쏟아내니 말이다.

감정을 음악으로, 몸짓으로, 그림으로, 그리고 지금처럼 글로 흘려보내며 잘 버텨보아야지.


슬픔이 파도 치듯 찾아오더라도 흘려보내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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