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동료 중에 소위 대치맘이 있다. 아이 교육을 위해 마포에서 강남으로 이사한 그녀는 대한민국 최고의 학군지인 대치동에 입성하여 아이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영재원부터 사교육이야기까지 톡 건들면 나오는 그녀의 교육 이야기는 늘 다른 세계 이야기 같고 흥미진진하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풀배터리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순간 표정이 굳어졌었다. 비밀을 들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그녀가 그 단어를 안단 말인가?
풀배터리 검사는 정신과에서 진행하는 심리검사들의 총체를 뜻한다. 상황에 따라 다를 수는 있으나 대개 지능검사와 인성검사 등이 포함된다. DH는 만 4세가 되었을 때 풀배터리 검사를 대학병원 소아정신과에서 진행했다. 아이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교육이 시작되는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만 4세 이후 유치원을 필두로 기관 교육이 시작된다. 느린 아이의 부모는 큰 선택의 기로에 선다. 특수 교육의 길을 갈 것인가, 일반 교육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특수교육대상자가 되면 여러 가지 지원들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낙인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 무렵 DH는 특수교육을 위한 길로 결정을 했다. 그래서 객관적인 증명이 필요했다. 웩슬러, 사회성숙도검사, 다면적 인성검사, 카스 등 처음 들어보는 수많은 검사들을 그렇게 진행했다. DH만이 아니다. 대부분 발달의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은 그 무렵 수많은 검사를 받게 된다.
이렇듯 나름 이쪽 세계에서 스토리가 많은 것이 풀배터리 검사다. 그런데 이 단어가 대치맘에 입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은 이러했다. 최근 엄마들 사이에서는 아이들의 교육 전환기에 지능검사와 인성검사, 적성검사 등을 받는 게 유행 같지 않은 유행이라는 것이다. DH가 검사한 것들의 일부분이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검사들을 풀배터리라고 불렀다.
초등 입학 전, 고학년 전, 중학교 입학 전 등 대걔 3~4년 간격으로 아이들의 지능과 마음 상태를 전반적으로 체크하는 것이 요즘 트렌드라고 했다. 심지어 영재원 준비를 위해 지능 검사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고 알아보니 검사하는 곳은 다양했다. 병원에서만 진행되는 검사가 아니었다. 발달센터, 학습컨설팅 업체 등 수많은 곳에서 검사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신기했다. 이제는 심리 검사를 쇼핑하듯 골라서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우리가 건강검진을 하듯 심리검사를 정기적으로 확인하는 시대. 우리 마음 챙김을 더 신경 쓰게 된 사회가 조금은 반가웠다. 하지만 무엇인가 찝찝함이 남았다. 엄마들은 왜 검사를 하는 것일까? 국어, 수학 성적을 받듯 아이의 지능을 점수화하여 무엇하겠다는 것인가. 지능검사의 숫자가 우리 아이의 잠재력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인가.
센터를 다니면 아이의 평가 점수를 줄줄 외고 있는 엄마들을 만난다. 카스 몇 점 웩슬러 몇 점. 이러한 숫자들을 들으면 아이를 보지 않아도 아이 기능이 대충 이 정도겠구나 하는 추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무섭게도 다른 아이와 내 아이를 비교하는 척도가 된다. 설사 다른 아이가 나의 아이보다 조금 부족해 보이는데 점수가 좋다면 검사를 다시 진행하는 경우도 보았다.
의도하지 않게 아이의 가치를 숫자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비단 이쪽만의 이야기 일까. 이쪽의 세계와 그쪽의 세계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사실 아이를 잘 들여다보고 대화하다 보면 이 아이의 특성이 눈에 보인다. 강점이 무엇이고, 단점이 무엇인지. 커가면서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영유아기의 아이들은 그러하다. 우리가 놓치고 있을 뿐이다.
최근 자폐스펙트럼이나 ADHD의 발병률이 높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원인 중 하나로 엄마들의 정보와 예민도가 올라갔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 좀 더 세심해지는 엄마들. 그러나 엄마의 예민함에 아이들이 숫자로 줄 서는 일들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